돌아갈 수 없는 꿈_16

베트남인들의 한국 이민 개척사

by 이종섭

제4부. 베트남 타운



26. 수상한 동네 기산동(機山洞)


경기도 화성시 병점동. 그곳에서 태안을 거쳐 ‘북진안길’이라는 작은 길을 따라 논밭 한 가운데의 길을 10여 분간 지나고 나면, 허름한 주택과 공장들이 뒤섞여 하나의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 동네가 바로 ‘틀뫼’ 라는 의미를 가진 기산동(機山洞)이었다.

그러나 수상하게도 이 마을은 베틀(機)은 물론 뫼(山)도 없이 이름만 기산동(機山洞)으로 불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수상한 것은, 반정천이란 개울이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면서 용정교(龍亭橋)라는 다리가 놓여있기도 하고, 슈퍼마켓, 음식점, 미용실은 물론이거니와 아무개 공사(公社)의 지소까지 자리하고 있는 적지 않은 규모의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5,000분지 1의 지도에서조차 검색되지 않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옛날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도깨비 터’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고려시대 유물은 물론이거니와 삼국시대에 사용되던 유물까지 출토되고 있다고 하므로 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장소였음이 분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알려진 이 마을의 역사는 불과 일백 년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이곳 마을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불가사이 한 운명으로 인하여 유구한 세월 동안, 그때그때 사라졌다가도 다시 생겨나고 또 다시 사라지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조성되어 있는 마을 또한 스스로의 문화나 전설을 창조하기도 전에, 어느 순간에 다시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릴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사람들은 누구도 마을의 역사를 묻거나 알려고 하지 않으며, 내일의 운명을 미리 기약하지도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언제부턴가 이곳에는 주택은 줄어들고 그 자리에 공장이 하나 둘씩 들어서더니, 지금은 주택의 숫자와 맞먹는 정도로 이곳저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공장의 사람들은 대개 이웃 공장이 무슨 종류의 공장인지, 또는 어느 기업과 거래를 하는지, 어떠한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는지 등을 알지 못하며, 서로 간에 약속이나 한 듯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여기 간판도 없는 ‘협성정공’이라는 상호의 공장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약 2년 전부터 Van이 와서 일하고 있는 이 공장에서는, 밤이 깊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종사자들이 퇴근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런 사정을 아는 사람은 그들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오늘 안으로 다 끝낼 수 있을까, Van?”

“밤늦게나 끝날 것 같아요, 사장님.”

“피곤한데 내일 아침에 끝내지.”

“오늘 끝내야 내일 아침에 물건을 실어 놓을 수 있어요. 사장님 먼저 퇴근하세요.”


그런데 이 공장의 경영사정은 시국이 불황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조금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장과 Van이 주고받는 대화내용을 볼 때 적지 않게 일감이 넘쳐나 밀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공장에는 7, 80평 남짓한 작업장의 왼쪽 벽면으로는 대형 CNC선반이 하나 차지하고 있고, 작업장 중간에 밀링 3대와 오른쪽에 드릴링과 연마기 등 소형 기계 5대와 용접기, 절단기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작업장에는 여기저기 작업대와 재료, 원료들이 놓여있을 뿐 아니라 쇠를 깎을 때 나온 쇳조각 부스러기가 치울 새도 없이 산더미처럼 한쪽 구석에 쌓여 있어 그 밀려터지는 일감의 양을 가히 짐작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사장 겸 주 기술자인 김남일은 주문 받은 부품을 설계도면에 따라 수치를 맞추어 조정해 놓은 밀링으로 주먹의 반 정도 크기의 쇠붙이에 연신 엔드밀(쇠를 깎아 내는 끝날) 자국을 내고 있었다. 이 작업이 끝난 제품은 다시 한 달 전부터 들어와 일을 하기 시작한 Anh이 받아 그 엔드밀 자국에 맞추어 드릴링으로 구멍을 뚫게 된다. 그런 다음 홀 중앙의 작업탁자에 앉은 또 다른 베트남 국적의 한 여성 근로자 Ly(Ho Thi Ly)에게 보내지면, 그 구멍에 스프링과 나사를 끼운 후 이상이 없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다음에야 제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Van은 선반 앞에 앉아 다른 제품의 쇠를 둥글게 깎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작업은 정밀도가 비교적 높은 특수가공작업이므로 바이트(쇠를 깎는 칼)를 자주 교정함으로써 바이트 마모로 인한 오차를 줄여야 한다. 이 작업은 Anh이나 Ly가 하는 단순 반복 작업보다 작업 속도는 매우 더디지만, 정밀가공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므로 작업 단가(가공 수주단가)는 꽤 높은 고부가가치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종사자들이 하루 12시간정도를 일할 때 한 달 월급으로 1,000,000원부터 1,200,000원 사이를 받고 있는데 비하여, Van은 그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1,500,000원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베트남 종사자들은 자신보다 많은 Van의 고액 월급에 부러움을 느끼면서도, 자신도 노력하면 그렇게 받을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곳의 작업은 보통 밤 8시를 기준으로 하여 종료된다. 일이 적을 땐 그 이전에도 끝나므로 8시를 초과하여 일한다 해도 야근수당은 지급되지 않지만 종사자들은 야근 하는 것을 더 원한다. 왜냐 하면 밤 8시가 넘어 끝나야 저녁 식사가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저녁식사를 제공받으면 생활비도 절약될 뿐 아니라 집에 가서 다시 밥을 해 먹어야 하는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한국인 근로자들과는 달리, 힘만 들지 않는다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개인적 시간이 특별히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일이 일찍 끝나는 사람도 먼저 퇴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퇴근하였다. 집에 일찍 돌아가 봐야 TV를 보거나 잠자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은 없었다. 돈이 들어가는 자기계발이나 취미생활에 시간을 투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런 이유로 이들에게는 한국인 친구도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다만, Van의 경우 취미생활은 하고 있지 않지만 일반적인 베트남 사람들과 달리 틈나는 대로 한글을 배우거나 기계도면을 읽는 법을 배우고 있었으며, 거래처 한국인들과 한국말로 대화하기를 즐기는 편이었다.

이날 작업이 모두 완료된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Van은 제품을 정리하여 박스에 넣고 난 다음 작업일지에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일지를 사장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일지 옆에는 ‘5일간의 가공료, 공급가액 970만 원’ 이라고 적힌 세금계산서가 미리 끊어져 있었다. 이는 인건비와 원, 재료비 등 모든 경비를 제하고도 1일 150만원이 넘는 수익금이었다.

Van 일행은 피곤한 탓에 수돗가에서 손만 씻고 옷을 수건으로 털어낸 다음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주거지 연립주택 202동으로 향하였다. 변변한 이름도 없는 이 무명의 연립주택 단지에 들어서서 202동보다 먼저 위치한 201동 앞을 지나려는데 한 쌍의 남녀가 나와 Anh 앞으로 걸어왔다. 가로등이 밝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옷차림새와 얼굴 윤곽이 낯익은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바로 한 달 전 병점역 앞에서 만나 전화번호를 주고 간 Hue(Dang Thi Hue)였다. 그들도 Anh을 알아보는 것 같았지만 빙그레 웃기만 했을 뿐 아무 말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이곳 연립 201동과 202동은 대부분 외국인 근로자들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상태였으며, 그중에도 베트남 노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실질적인 ‘베트남타운 ’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곳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웃과 모임을 갖는다든가 동료의식을 가지고 긴밀하게 교류를 한다든가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Van, Anh, Ly 일행은 다시 202동으로 들어가 2층 201호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Ly는 작은 방, Anh은 큰 방으로 들어갔다. 각자 홍차를 달여 마시며 어디엔가 전화통화를 하고는 잠이 들었다. 그러나 이날도 Van은 한 참 동안 책을 읽고 난 후에야 방의 불을 껐다.



27. ‘용정교’(龍亭橋)의 맹서


Tet(구정)가 지나가고 3월마저 마지막에 이르니 아직 바람은 차가웠지만 반정천 주위의 나뭇가지에 눈이 트이며 봄기운이 완연하였다.


“Anh, 이 다리가 무슨 다리인줄 알아?”

“여기 ‘용정교(龍亭橋)’라고 써 있는데, 아니야?”

“맞아. ‘용정교(龍亭橋)’. 참 좋은 이름이야. 저기 아래에 가면 마을 사람들이 수호신으로 모시는 정자(亭)가 있어서 때마다 제(祭)를 지낸다더군. 한국인은 곰의 자손이래. 곰은 땅 위에서 사니 나무가 있고, 그래서 나무는 중요한가봐.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용(龍)의 후손이야. 그러니 이 ‘용정교’(龍亭橋)라는 다리는 의미가 적지 않아. ‘한국인과 베트남인이 만나는 다리’ 라는 뜻이 되니까.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마음속으로 ‘오작교’(烏鵲橋)라고 부르기도 하지.”

“‘오작교’(烏鵲橋)가 무슨 뜻이야?”

“응,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음력 7월 7일에만 까마귀가 다리를 놓아 서로 사랑하는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준다는군. 그 까마귀가 놓아 주는 다리가 ‘오작교’래.”

“무슨 슬픈 사연이라도 있었나보지? 사랑하는 견우와 직녀라...”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가금씩 여기 나와서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께서 Van을 많이 사랑해 주셨나봐?”

“난 어려서 할머니 손에 컸어. 낮에 부모님들은 돈 벌러 나가시고 집에는 나와 할머니만 남았지. 틈만 나면 나에게 우리의 신화와 전설을 이야기 해 주셨지.”

“근데 이 다리와 무슨 상관이야?”

“우리 동네에도 이런 다리가 하나 있었어. 미군 폭격에 부서진 채로...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아래 징검다리를 놓아 밟고 다녔지, 내가 학교 다닐 때에도... 하지만 스콜(squall)이 쏟아지면 냇물이 불게 되고, 그럴 때마다 할머니께서 마중 나오셔서 나를 기다리셨지. 행여 내를 건너다 빠질까봐 걱정이 되셨던 거지.

할머니와 나는 반대편 냇가에 앉아 서로 바라보다 물이 줄면 그때 건너와 가운데서 손을 잡았지. 어떤 땐 물에 빠지기도 했지만, 장난기가 많았던 나는 옷이 젖었어도 그게 재미있었어. 난 이 다리가 그 부서진 다리라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

“그래서 마음이 울적할 때면 항상 이곳을 나와 바람을 쐬지. 특히 비가 올 때면 더 생각나. 내가 몇 년 전, 정든 농장을 떠나 새로운 꿈을 안고 이곳 공장에 와서 첫 월급을 탔을 때, 나는 여기서 할머니께 맹서했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는 절대로 베트남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소기의 목적?”

“그래. 너도 목표가 있겠지만, 나도 있어.”

“뭐야? 난 아직 목표가 없어. 그냥 하루하루 살기 바빠...”

“나는 50억 원이 목표야. 한국 돈 50억 원이면 베트남 돈으로 약 800억 원 정도 되는데, 그 돈 벌면 베트남으로 가서 공장을 차릴 꺼야.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인보다 손재주 많아.”

“흐익! 그렇게 많이?”

“베트남 사람들에겐 많은 거지... 지금 식으로 계속하면 너도 나도 목표달성은 불가능해. 넌 한국에서 살아야 하니까 더 많이 벌어야 하겠지만...”

“그럼 어떻게 해?”

“한국 사람과 같이 경쟁을 해야 해. 지금 베트남 사람들처럼 하면 아무 것도 안 돼. 발전이 없어. 여기도 봐. 가공한 이익금은 모두 한국 사장이 챙기고, 베트남 근로자는 바나나 씨앗만큼도 못한 월급만 받고 있잖아.”

“Van은 항상 말이 어려워. 쉽게 해봐.”

“우린 한국 사람들과 싸워야 해. 총칼로 싸우는 전쟁은 적과 아군이 분명하지만, 경제전쟁은 그런 거 뚜렷한 구분이 없어. 필요하면 협조하고 필요하면 경쟁하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 우린 한국 문화를 배우고 신용을 쌓아야 해. 지금 베트남 사람들은 돈 몇 푼 벌면서 안주하려고 하는데, 아주 잘못된 거야. 그러면 발전이 없어.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는 거야.”

“가난하다고 멸시하는 거 아닐까?”

“천만에! 그건 자격지심이야. 중국, 몽골 사람들도 가난하지만 우리보다 좋은 대우 받아. 베트남 사람들 보다 나은 인간적 대우를...”

“그럼 뭐야? 왜 그래?”

“생각해 봐. 여기는 한국이야, 베트남이 아니라구.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에 와서 3년, 4년이 되어도 한국말을 거의 못해. 아예 배울 생각을 안 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한국인 친구도 없어. 한국사람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무시당하는 것이 당연해. 중국 한족, 몽골 사람, 우즈베키스탄 사람들 이곳 와서 2년만 되면 한국말 유창하게 잘해. 그러니까 대화가 통하고 친구로 대우 받는 거야.”

“그건 그래. ‘무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말은 너무 하지만...”

“천만에! 절대 너무하지 않아. 한국에서 경쟁하고 살아가려면 한국 문화를 배워서 한국인들과 친구 사귀고 정정당당하게 어울려야 하는데, 우리 베트남 사람들은 주는 대로 돈만 받다가 그냥 가는 거야. 너무 폐쇄적이야. 이래가지고는 전혀 발전이 없다구.

나도 베트남 사람이지만, 이건 분명히 베트남 사람들이 잘 못 하는 거야. 한국인들은 옛날 미국, 독일 가서 힘들게 일하고도 밤에는 그 나라 말 배우고 친구 사귀고 그랬댔잖아?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이유가 있고, 부자는 부자 된 이유가 분명히 있어.”

“그래서 매일 한국어 책 읽는 거야?”

“당연하지. 우린 자존심을 지켜야만 하고, 자존심은 승리하는 사람만이 지킬 수 있어. 내가 한국으로 떠날 때 할머니께서 하신 말씀은 딱 한가지였어. ‘어디 가도 자존심을 잃지 말라!’ 라는 거, 딱 한마디였어. 처음 한국에서 1년간은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힌 시절이었지. 결코 잊을 수 없어.”


Van은 잠시 생각에 젖는 듯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 후, 농장에서 일한 6개월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시간이었어. 난 그 자수성가 하신 농장주에게서 진정한 한국의 현실을 깨닫고 사업가가 되는 꿈을 전수받았거든.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월급쟁이로는 만족할 수 없다! 이거야.

우리 베트남 사람들은 장점이 많아. 단일민족 한국이 한 가지 생각할 때, 우린 60개 민족이 하나씩 60개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 수 있다구. 단지 실행, 즉 모험을 안 하는 게 문제지만....

그리고 Anh! 저기 좀 봐. 이 주위의 개발되는 저 신도시의 아파트 숲들을 좀 보라구. 또 저 쪽엔 세계적인 기업 삼성전자 공장이 있지. 언제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중장비들로 실 같이 가느다란 이 냇물을 덮어버릴 지 몰라, 풍전등화나 다름없다구. 마치 우리 가슴속에 흐르는 눈물처럼 계절에 따라 말랐다 흘렀다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이 냇물은 이 마을에서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지켜질 수도 메워질 수도 있어. 아무리 개발의 욕구가 크다 해도, 물이 맑아 생명이 숨을 쉰다면 결코 없애지 못해. 누구에게나 필요할 테니까....

내 자존심도 마찬가지야. 일 끝나면 나도 피곤해. 하지만 더 많이 노력한 결과로 너희들 보다 월급 많이 받잖아. 상담 원활하게 하고 설계도면 볼 줄 알게 되면 200만원까지 올려준다고 사장님이 약속 했어. 필요하게 해서 대우 받는 것, 이게 바로 자존심이야.”

“그럼 나도 가능한 거야? 그 자존심?”

“물론! 당연히 가능하지.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베트남 사람들의 고정된 사고방식일 뿐이야.

생각해 봐. 지금은 사장님이 없으면 공장이 돌아갈 수 없어. 사장님 외에는 주문해오는 도면을 볼 수도 없고, 상담할 사람도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우리가 그걸 대신하면 이곳 매출은 배 이상 뛸 꺼야. 그러니 월급을 200만원으로 올려줘도 아깝지 않겠지. 직원도 두 명 정도 더 써야 하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받는다 해도 50억 원 만들려면 어느 세월에?”

“흐흠, Anh! 월급쟁이는 되도록 빨리 끝내야 해. 돈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하거든. 망할 수도 있는 모험이지만, 그렇다고 구차한 현실에 안주한다면 우리에게 번영은 영원히 오지 않아. 우리가 한국어에 능숙하고 기술 충분하다면, 우리도 사업 할 수 있는 거야. Mai도 해장국 장사하잖아. 아파트 24평 살다가 금방 40평으로 이사 갔어. 월급쟁이로는 어림도 없지.”

“그럼 우린 무슨 사업? 나도 참여하면 안 돼?”

“왜 안 되겠어? 오늘부터 당장 한국어 공부 시작 해. 그리고 주말마다 병점에 나가 한국인 친구 만나 대화하자구. 나하고 함께 하면 더욱 빨라. 상담을 할 정도로 한국어 유창하게 되면 우린 이 공장 일부를 인수할 수 있어. 사장님과 상의한 적이 있는데, 모든 것을 사장님이 혼자 다 하려니까 효율도 안 오르고 힘이 든다는 거야. 또 일이 더 많아지면 세금이 너무 많이 부과된다는군. 그래서 내가 일부를 인수하겠다고 했어. 난 이미 신용을 쌓아 가고 있어. 신용은 곧 재산이니까.

그런데 자금이 부족하니까 나에게도 Anh이 절실히 필요해, 사업자 명의도 Anh으로 해야 되고, 난 불법체류자니까. 우린 일 하는 만큼 월급을 타고, 남은 수익금은 투자비율에 따라 나눠가지면 돼.”

“언제부터 가능해?”

“자본을 모아야 하니까 한 2년은 더 걸릴 거야. 기계가 중고라도 몇 천만 원은 족히 되거든.... 그동안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하고 기술 열심히 배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거야. 망할 각오, 죽을 각오로 해 보자구.”

“나도 집을 나올 때 이미 죽을 고생을 각오하고 있었어, Van! 어려울 땐, 그때 눈보라 속에서 기다리던 날을 생각을 하거든.... Van이 그날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아마 얼어 죽었을지도 몰라. 다시 태어난다는 생각으로 한 번 해 보자구! 나는 망해도 손해 보는 거 없어. 최선을 다 할게.”

“좋아, 앞으로 어려울 때, 이 반정천의 ‘용정교’(龍亭橋), 아니 ‘오작교’(烏鵲橋)에 나와 용기를 구하자구. 난 우리 베트남의 용신(龍神)이 여기에 있다고 믿어.”


Van은 두 손을 힘주어 가슴에 모으고, 비장한 표정으로 남쪽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수호신 Lạc Long Quân이여! 제게 희망과 용기를 주소서.”


Anh도 따라 하였다.


“우리는 문랑국(文郞國)의 후예들, 꿈을 잃고는 살 수 없나니, 꿈을 유지하게 하소서!”



28. ‘이슬’이 엄마의 눈물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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