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수의 무명의 시절, 꿈에 그리던 프로 팀에 입단은 했지만 2년이 지나가도록 두 골밖에 넣지 못해 좌절하고 있던 때였다. 장래가 유망하다던 고교시절의 찬사는 다 어디로 가고 벤치에서 구경만 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만 가는데, 훈련 때마다 감독과 코치에게 모욕적인 면박을 당하면서 하루하루 자존심을 구겨야 했다.
“나이가 벌써 스물 둘인데도 아직까지 감각이 그 모양이냐. 일찌감치 생각을 달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앞길이 창창하니깐 말야.”
도대체 축구만 하며 성장한 자신을 보고 이제 와서 생각을 달리해라 한다면 한강에 처박혀 죽으라는 뜻 아닌가? 하긴 모욕적 언사야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면 되니 그래도 연습할 때가 제일 나은 편이었다. 스타가 되지 못한 프로선수가 겪는 고충은 가시덤불로 우거진 정글 속을 헤치는 것보다도 힘든 것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선배들의 짐꾼이 되어야 하고 합숙소의 청소도 도맡아야 했다. 게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무명의 선수는 아예 유니폼을 벗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연봉만 타먹는 선수를 좋아할 팀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었다.
‘골 못 넣는 공격 선수는 스타는커녕 인간도 아니야.’
그날은 훈련 도중 오른 쪽 발목에 금이 가고 왼쪽 검지손가락이 꺾어지는 부상을 당한 후 병원을 드나들며 한참 치료를 하고 있던 때였다. 진료를 끝내고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계산할 차례를 기다리는데, 뜻밖에도 지수 선수를 알아보는 고등학교 2학년 쯤 되어 보이는 나이 어린 처녀가 있었다. 무슨 병에 걸렸는지 저승사자보다도 핏기가 없는 하얀 얼굴, 군데군데 빠져버린 머리카락 때문에 희끗희끗해진 자국을 감추려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환자복 차림으로 말을 걸어왔다.
“혹시 천리마 축구단 지수 선수 아니세요? 맞죠?”
동료고 선배고 간에 호의적인 소리를 들어본 지가 하도 오래된 지수는 무명인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반가웠다. 매일같이 병원을 들락거려도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수많은 환자와 보호자들 중에서 여태껏 누구 하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야 드디어 자신을 알아보는 팬이 나타나다니,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였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요즘은 출전을 안 하는데...”
“어머 반가워요. 전 알아요. 지수오빠가 내가 좋아하는 야구선수 최승엽을 닮았거든요. 오빠도 언젠가는 꼭 최고의 스타가 될 거예요.”
“아니 그럼 내 팬이 아니고 야구 최승엽 선수 팬이란 말이야? 어쩐지... 쳇!”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속 있는 그대로 지껄이는 가식 없는 소녀라서 더욱 좋았다.
“야구선수는 아니래도 처음 만난 프로선수신데, 싸인 하나 해 주실래요? 여기...”
“그러지 그럼...”
“전화번호도 적어주시면 안돼요? 핸폰...”
“전화번혼 왜?"
“골 넣는 날 맛있는 거 사달라고 전화 할려구요. 제 이름 ‘선아’거든요. 유명해진 다음에도 잊지 마세요. 알았죠?”
“알았어, 그런데 골? 내가 골 넣을 때....?”
지수는 웃음이 나왔다. 프로선수생활 벌써 3년차인데, 지난 2년 동안 넣은 골이 고작 두 꼴, 그러니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고교시절엔 그래도 득점왕을 두 번씩이나 했던 유망한 골잡이였었다. 하지만, 프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은 골은커녕 벤치만 지키고 앉았는데 어느 세월에 골을 넣고 맛있는 것을 사줄까마는, 유일한 팬이 하는 부탁이라 못이기는 체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한마디 덧붙였다.
“최승엽은 톱스타지만 난 꼴찌선수야, 무명선수라구... 약속은 하겠는데 나에게 맛있는 거 얻어먹는 거 보담은 이담에 시집가서 네 남편에게 얻어먹는 게 빠를지도 모르지...”
“거만하지 않는 꼴찌가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일등 하는 사람은 자만하다가 추락하기 쉽지만 꼴찌는 맘만 먹으면 많이 올라갈 수 있어 좋거든요. 오늘부터 꼴찌오빠 지수 선수를 콱! 믿을 게요.”
잡담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 새 전자 게시판에 지수의 번호가 깜빡이고 있었다. 계산을 마친 후 헤어져 택시를 타고 돌아왔지만 눈만 감으면 선아가 하던 그 말이 자꾸만 되살아났다.
‘거만하지 않는 꼴찌가 더 좋을 수도 있어요. .... 오늘부터 꼴지오빠 지수 선수를 콱! 믿을 게요.’
그러고 보니 지수는 왜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고 하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골을 넣을 때 팬은 자신을 위해 축하해주는데, 그럼 자신은 단 하나밖에 없는 그토록 소중한 팬을 위해 언제, 무엇으로 축하해주나? 최승엽 선수는 워낙 팬이 많으니까 신경 안 써도 별거 아닌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연고 없이 아는 유일한 팬이 하나 생겼는데, 받는 것만큼 주는 것도 소중하게 알아야 진정 프로 아닌가?
코치가 하던 말도 생각났다. ‘넌 항상 핑계가 많아.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야.’ 하던 그 말... 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맞아, 난 너무 건방졌어. 그 고딩 팬이 날 깨우쳐준 거야.’
그러고 보니 갑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진정한 스타가 되려면 그라운드에서 골을 넣더라도 조금은 겸손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젠 자신의 팬 선아를 위해 골을 넣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야 맛있는 거라도 사주면서 진정으로 팬에게 보답할 테니까.
3.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