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끝나지 않은 약속_04

by 이종섭

4.


‘신발은 진열장에 넣고, 티는 내 방에 걸어 놓을 거야, 절대 빨지 마, 오빠의 땀이 물신 배어있는 그대로가 좋아. 오빠가 생각 날 때마다 난 그 냄새를 맡을 거야.’


지수는 입고 있는 티를 만져보았다.


‘오빠의 땀이 물신 배어있는 그대로...? 더 젖어야 해. 땀을 더 흘려야 한다구. 선아가 맡을 수 있도록 더 흠뻑 적셔야 한다구.’


지수는 선아를 알고 난 이후 지난 3년 동안 누구보다 땀을 많이 흘렸다. 그동안 모든 프로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홈페이지도 없애버렸고 최근엔 컴퓨터 자체를 없애버렸다. 모든 역량을 훈련에만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저녁나절 어둑할 때까지도 공중으로 떠오른 공의 낙하지점을 찾아 뛰어가는 훈련을 해왔다. 선아와 야구장을 찾는 것 외에는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훈련을 거듭해 왔다.

강하게 차던 습관을 버리고 오로지 빠르고 낮게, 정밀하게 차는 것만 연습해 왔으며, 뒤뚱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는 오뚝이의 근성은 태클을 피하는 유익한 방법이 되기도 하였다. 힘겨울 때마다 선아를 살려야만 한다는 집념으로 노력한 결과 성적은 나날이 좋아졌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갑자기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꿈에 그리던 월드컵 경기에 참가하여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연장전이 시작되었다. 체력과 개인기가 뒤지는 한국 팀은 연장전에서도 수세적인 입장에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지수는 전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왼쪽 중앙선상의 위치에서 준비운동을 하듯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호랑이 감독이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고 손짓을 했지만 본체만체 하였다. 이젠 아무리 지수가 못마땅하더라도 다른 선수와 교체할 수도 없으며, 주심에 의한 퇴장명령만 없다면 그라운드 밖으로 끌어 낼 수도 없었다.

연장전 24분이 지날 무렵, 그때까지도 공격을 지속하던 독일 팀은 너무나 공격에 치중하던 나머지 키퍼와 풀백 1명 도합 2명을 제외한 모두가 중앙선을 넘어 한국 진영에 와 공격에 가담하고 있었다.

키퍼도 페널티 라인 밖 10여 미터 지점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으며 풀백도 중앙선상 가까이 다가와 서 있었다. 변변한 공격이 단 한 번도 없는 한국 팀의 경우 4:3:3 도 4:4:2 도 모두 의미 없는 이론에 불과했다. 그런 일방적인 경기 속에서도 지수는 왼쪽 중앙선상 부근에서 얄밉도록 빈둥빈둥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바로 이때였다.


한국 팀 오른쪽 미드필더가 공을 가로채고서는 상대진영을 향해 정신없이 볼을 걷어찼다. 급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내질러 차버린 것이었다. 공은 독일 팀 왼쪽 풀백이 서 있는 쪽으로 높이 날아갔다. 마치 야구장에서 배트로 친 공이 야외로 날아가듯 쭉 쭉 뻗으며 높고 멀리 날아갔다.

갑자기 두 눈에서 번갯불을 뿜어낸 지수는 기회를 놓칠 새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그러다가 딱 돌아서자 그곳이 바로 공의 착지지점이었다. 등 뒤로 수비수 풀백의 시야를 가린 다음 볼을 받아 다시 돌아서서 페인트모션으로 수비수를 제친 다음 상대 골문을 향해 질풍처럼 나아갔다. 독일 팀 다른 선수들은 이제야 일제히 중앙선을 넘어오고 있었지만, 이미 페널티 라인 가까이 들어선 지수 앞엔 오직 골키퍼 한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지수는 갑자기 속도를 늦추었다.


‘침착해야 해, 잡초 사이를 헤집는 꿀벌처럼... 서둘다간 거미줄에 걸린다구.’


빠른 속도로 질주하다보면 키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양 손을 앞세우며 온 몸으로 달려들어 태클을 시도할 것이고 그러면 공격은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천천히 접근하면 키퍼도 달려들 기회를 먼저 살필 것이므로 한 템포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페널티 라인 바로 직전에서 골을 정지시켰다. 페널티라인 밖에서는 키퍼도 손을 쓸 수 없기 때문이었다. 1대1 상황이므로 한 발짝만 앞에 나가서 차면 페널티킥과 다름없다. 아니 오히려 더 유리하다. 곁눈질로 슬쩍 살피니 어느 새 독일 선수들이 등 뒤 10미터 부근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관중석에서는 꽹과리소리, 북소리, 피리소리 등 온갖 잡소리와 함성이 운동장을 폭파시킬 듯 요란하게 울려댔지만 지수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숨 막히는 긴장 속에 온 몸에는 소름이 돋는 듯 하였다.


‘아~, 침착해야 해, 침착!!’


앞에서는 키퍼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퍼컷을 날릴 것처럼 달려들 기세였고, 뒤에서는 수비수들이 자신을 걷어차고 짓밟을 것처럼 8미터, 7미터까지 근접하며 촌각을 다투었다. 이젠 더 이상 찰라 만큼의 여유마저도 남김없이 모두 소진되고 말았다.


5.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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