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기보다 뜨거웠던 전세 계약서, 그 비릿한 성공의 서막
2~3년 내 해외 주재원 파견을 계획하던 내게 고민이 생겼다.
딸아이를 어수선한 신도시 검단에서 중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해외로 나가 다시 국제학교를 다녀야 한다면, 단 몇 년이라도 '근본' 있는 학군지에서 대한민국 교육의 정수를 맛보여주고 싶었다.
강남과 목동의 중학교 순위를 나래비 세우고 인근 재건축 단지들을 리스트업했다. 당시(24년 초) 시세로 방 3개짜리 아파트 전세가 5~8억 선. 처음엔 물리적으로 가까운 목동 뒷단지를 고민했지만, 강남 임장을 두 번 다녀온 우리 부부의 마음은 이미 강남으로 급격히 기울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방점을 찍은 건 역시 아내의 결단이었다.
부동산 이론엔 빠삭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늘 아내의 과감함이 빛을 발했다.
회사 선배가 소개한 개포동 부동산 소장님의 손에 이끌려 퇴근 직후 재건축 단지 세 곳을 돌았던 23년 10월의 어느 날. 마지막 집을 본 아내가 거침없이 내뱉었다.
"1천만 원, 지금 바로 입금할게요."
단호했다. 바로 전날, 입주하려던 신혼부부가 대출 문제로 계약 직전 엎어졌다는 소장님의 귀띔이 아내의 본능을 깨운 모양이다. 그날 밤 가계약금을 쐈고, 그 주말 도장을 찍었다. 집주인은 분당에 사는 의사 부부였다. 그는 '20년도에 매수했는데, 우리가 전세 계약을 할 때 이미 7억이 올라 있었고, 26년 2월 현재는 무려 18억이 폭등한 상태다. 부러웠다. 그리고 다짐했다. '우리도 이곳을 베이스캠프 삼아, 언젠가는 반드시 강남에 내 이름 석 자 박힌 등기를 치리라.'
계약서를 쓰는 순간, 평생 처음 강남에 입성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훗날 진짜 내 집 등기를 친 날보다 그때가 더 짜릿했다. 지금 되돌아보니, 그 비루한 '썩파트' 전세살이가 내가 강남 소유주가 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 그 곳에 살지 않았다면 간절함은 무뎌졌을 것이고, 치열함은 식었을 것이며, 현지 소장님들과의 끈적한 정보 네트워크도 없었을 것이다.
마흔이 넘어 겨우 들어온 강남. 만약 신혼 때 소박하게나마 여기서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그랬다면 더 빨리 보고, 듣고, 배우며 '나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일찍이 현실로 바꿨을 텐데.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강남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자들만 들어가는 '공고한 아성'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선동 때문일까, 언론의 가스라이팅 때문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당신은 그 두려움을 깨고 어떻게든 머리부터 들이밀어야 한다. 일단 들어와야 마음이 생기고, 마음이 생겨야 행동하며, 행동해야 비로소 이룰 수 있다.
쥐뿔도 가진 것 없던 나 역시, 강남 썩파트 전세를 지렛대 삼아 1년 반 만에 진짜 '강남 등기'를 손에 쥐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그 낡은 아파트가 누군가에겐 비웃음거리일지 몰라도, 나에겐 승리를 향한 가장 완벽한 베이스캠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