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작가가 차리는 밥상
누군가는 출근하고, 누군가는 등교하고, 누군가는 집에 남는다.
그런데 그 남는 사람들 중에는 집에서 일하는 재택 근무자들도 있다. 코로나 19로 많은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하는 요즈음, 재택 근무자들은 또 다른 고민을 할 것이다. 회사에 나갈 때는 그래도 점심 한 끼는 뭘 먹을지 고민하면서 사먹었는데 집에서 지내면 '뭘 해먹을지' 고민하게 된다.
'뭘 해먹을까?'를 한 사람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의외로 간단하겠지만, 그 기준이 2인 이상이면 좀 복잡해진다.
나는 오랫동안 집에서 근무하고 있다. 동화와 청소년소설을 쓰고, 짬짬이 다른 글들도 쓰고, 사람들을 만나고, 온갖 잡무를 하면서 집안일도 동시에 처리한다.
다행히 이제는 가족들이 자신들이 해야 할 영역을 나누기 시작했으므로, 내 몫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내가 꽤 많은 영역을 처리해야 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첫 자취집은 햇볕이 안 들어오고, 부엌도 주인집 딸과 함께 쓰는 구조였다. 그 방은 곰팡이가 심하게 피었고, 그 방에서 2년을 지내는 동안 몸이 많이 상했다. 그 다음 자취집은 집주인이 나이드신 분이었는데, 자식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집들은 모두 안방에 넣고 잠그고는 작은 방 하나와 부엌, 거실, 화장실을 쓰는 조건으로 자취를 얻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그 방이 참 좋았다. 방은 작았지만 마당이 있고, 거실에 소파까지 있는 자취방이었으니까.
출퇴근이 불규칙하던 직장을 다니던 나는 되도록 밥을 해먹으려고 애썼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엄마에게 전화로 물어가면서 찌개를 끓였다. 된장찌개에 된장을 어느 타이밍에 넣어야 하는지, 마늘은 찧는지 빻는지 편으로 써는지, 파는 다지는지 크게 써는지, 모든 게 다 서투르고 어설펐지만 나 혼자 뚝딱뚝딱 차려먹었다. 그래야 생활비를 덜 쓸 수 있었다. 그러다 결혼을 했다.
신혼 초, 나는 반려에게 우리가 앞으로 집안일을 어떻게 분배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반려가 자신이 청소와 정리 정돈을 맡겠다고 했다. 나는 청소와 정리 정돈에 자신이 없었다. 한 사람의 살림에서 두 사람으로 늘어난 것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게다가 결혼이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두 가족, 더 넓게는 여러 가족과 얽히는 일이라 그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반려의 집안은 청소와 정리 정돈에 일가견이 있었다. 내가 잘 하지 못하는 분야를 맡겠다는 말에 나는 덥석 또 다른 살림의 영역을 말했다.
"그럼 내가 음식을 맡을게."
이 말을 꺼낼 때만 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당시에 나는 요리에 막 흥미를 갖던 때였다. 1번과 2번 재료를 섞고 3번 양념을 하면 7번 같은, 예상하지 못했던 맛을 낼 수 있다는 의미에 흥분했던 때였다. 그 때부터 반려는 청소를, 나는 주방을 맡아왔다.
그러나 1년 365일을 나 혼자 주방을 도맡은 건 아니다. 가끔 반려도 주방에서 요리를 했다. 나보다 속도도 느리고, 반조리 식품을 가끔 이용하지만 꽤 요리를 하는 편이다. 어쩌면 반려가 어린 시절부터 먹어온 음식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부산 출신이고, 반려는 부안 출신이다. 여기서 내 밥상의 고통이 시작된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것도 복잡한데, 전혀 다른 입맛의 두 가족이 만나서 살아가니 이 어찌 복잡한 일이 아니겠는가.
처음 시댁에서 밥을 먹던 날을 아직 기억한다.
그때 시고모가 애호박전을 부쳤는데, 계란물에 점점이 박힌 빨갛고 푸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저게 뭐예요?"
"고추 다져서 넣었어."
맙소사! 애호박 전도 잘 안 해먹었을 뿐만 아니라 실고추를 쓰는 것도 호사스럽다 생각했던 내 밥상이 와장창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밥상은 고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