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e should be opened and shared
지난달에 서울 동대문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보르도 그랑 크뤼’ 전문인 시음회에 다녀왔다. 워낙 널리 알려진 와인의 시음회이다 보니 최근 위축된 와인 소비에도 불구하고 참석자가 많아 시음장이 바글바글했다. 다른 시음회에 비해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의 비율이 높은 것이 특기할만했다.
나는 사실 보르도 그랑 크뤼에 큰 관심은 없었다. 이 와인들이 역사적으로 유명하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가격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어쩌다 마실 기회가 생겨 천천히 한 병을 마셔본 적이 몇 번 있었지만 별로 인상 깊지 않았다. 분명 맛있게 잘 만든 와인이었지만 웬일인지 그 맛이 뇌리에 박히지 않는 그런 와인이었다.
이런 나의 개인적 취향에 더해 근래 보르도의 많은 샤또들이 기업화되어 terroir를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윤 추구를 우선시한다는 풍문을 듣기도 한터라 솔직히 이번 시음회에 큰 기대는 없었다.
어쨌든 잔을 들고 이 샤또 저 샤또의 와인을 마셔보았다. 나쁘지 않았으나 그 맛이 그 맛 같았다. 물론 샤또의 Gironde 강기준 좌우 위치에 따라 주력으로 쓰는 포도의 품종이 달라지니 Cabernet Sauvignon과 Merlot의 맛차이는 있었지만 생동감 없이 단조로운 맛들이 죄다 비숫했다.
시음 부스에서 와인을 따라주고 있는 해당 샤또의 포도 재배 방식을 물어봐도 다들 한결 같이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유기농으로 전환 중이지만 아직 인증은 못 받았다.”
그렇게 점점 시음은 지루해지고 남은 와인을 버리는 공용 바스켓 앞에서 치과에 온 듯 본격 가글을 하시는 어르신들의 기세에 눌리기까지 해서 그만 자리를 뜰까 고민을 했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몇 군데 더 시음을 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간 곳이 Château La Tour Figeac였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담당하고 있는 다른 부스와 달리 이곳은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가 와인을 따라주고 있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와인을 받아 마셨다. 그런데 이 와인은 달랐다. 한 모금이 또 한 모금을 부르는 와인이었다. 할아버지에게 포도 재배 방식을 물어보니 그는 바이오 다이내믹으로 재배하고 자연효모를 이용해 발효를 시키며 부르고뉴 스타일의 부드러운 압착 기법을 쓰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알고 보니 그는 그 샤또의 와인 메이킹 디렉터였다. 이름은 Pierre.
그에게 그의 와인은 살아있는 와인이라 오늘 시음한 것들 중 가장 내 스타일이고 맛있다고 말하자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진열돼 있던 와인 한 병을 내게 건네주면서 가져가서 한 병을 다 마셔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레이블에 자신의 서명까지 해주었다. 내가 놀라면서 감동받아서 고맙다는 인사를 반복하자 그는 “Wine should be opend and shared."라고 말하면서 진정한 와인의 의미는 나눔에 있다고 역설했다.
기대 없이 갔던 시음회였지만 와인에 진심인 사람을 만나는 행운으로 인해 잊지 못할 시음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