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YA Feb 25. 2023

그녀를 짓누른 것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단 한번 주어진 삶을 
가볍게 살 것인가 무겁게 살 것인가?



존재의 가벼움

 존재가 가볍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들의 존재가 가벼운 데다 그 가벼움이 참을 수 없기까지 하다니 이 책의 흥미로운 제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 일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은 말 그대로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존재의 가벼움은 이와는 대조되는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의 무거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영원회귀사상이란 하나의 신화로 우리에게 같은 일이 무한히 반복되는 삶을 나타낸다. 무한히 반복되는 삶에선 행동 하나하나도 신중하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원히 되풀이되지 않는다.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우리의 행동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행동과 다르게 행동했을 경우를 상정하여도 돌아갈 수 없으니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다. 삶이 가벼울 수밖에 없다. 방금 뱉은 말이 옳았을지 혹은 이 말을 뱉기 전 머릿속에 떠올리던 말을 뱉은 게 더 옳았을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역사의 잔혹함도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 돌이켰을 때 어떤 결단이 더 옳은 결정이었을지 알 수 없다. 이미 지나가버렸고 다시는 되풀이할 수 없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상황도 가정해 볼 수 없다. 전쟁은 이미 일어났고 프라하는 이미 공산당 지도자의 치하에 놓여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사랑

 저자는 이런 혼란한 시대상황 속 혼란스러운 사랑을 하는 네 명의 남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들의 사랑은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정의된다. 무거운 사랑을 하는 테레자와 가벼운 사랑을 하는 토마시 그리고 그의 연인 사비나, 사비나의 연인 프란츠.


외과의사인 토마시는 엄청난 여성편력을 보이는 인물이다. 수술대 위에서 환자의 피부를 개봉하듯이 수많은 여성들의 옷을 벗겨내는 것은 그에게 세상을 정복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반면 그의 부인(연인이지만 사실혼관계)인 테레자는 무거운 사랑을 원하는 인물이다. 그의 영혼이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의 육체마저도 자신만을 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토마시의 외도를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토마시의 연인 사비나는 조국의 불합리에 대한 혐오와 함께 자유를 갈망하는 예술가이며 유부남 프란츠는 자유로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자신과는 다른 모습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토마시의 외도는 그가 테레자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그녀를 사랑한다. 어느 날 그는 세상에 공산주의에 반발하는 선언문을 공개했고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이후 경찰들은 그에게 선언문을 철회하는 서명을 작성하라고 압박하기 시작했고 이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본인의 안위가 아닌 경찰들이 연인 테레자를 심문하여 그녀를 힘들게 할 것이라는 거였다. 그녀가 피해입을 상황을 우려한 그는 일을 그만두고 그녀와 자취를 감추길 결심했다. 그에게 의사라는 직업은 필연(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이었는데 테레자에 대한 사랑은 그러한 필연을 뛰어넘을 만큼 거대했다. 그럼에도 그의 여성편력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왜 그는 이토록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그의 육체가 다른 여성들의 방문을 두드리길 허락했을까? 이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테레자가 영혼과 육체를 동일시하는 사람이고, 토마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테레자는 태어나서부터 죄를 가졌는데 그것은 바로 육체의 죄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테레자의 탄생 이전부터 그녀의 존재를 부정했다. 또한 모든 육체는 특별할 것 없는 동일한 것이라며 육체를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따라서 테레자는 자신의 육체와 함께 영혼마저 원죄 속에 감추며 살아왔다. 그러나 토마시를 만나고 테레자의 영혼은 모습을 드러냈다. 단일화된 육체와 영혼의 윤곽이 드러났고, 테레자에게 사랑이란 영혼과 육체가 한 사람만을 향하는 즉 서로의 결합을 의미하게 됐다. 반면에 토마시의 사랑은 영혼과 육체의 엄격한 구분이었다. 물론 테레자에게는 둘 다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다른 여성들과의 육체적 결합에서는 테레자에게만 허용되는 영혼의 영역이 배제되었다. 그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오직 그녀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늘 불안했으며 그가 나약해지길 바랐다. 이는 다시 말하면 그가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못할 만큼 힘없고 나약해져서 육체와 영혼이 단일하게 그녀만을 탐하고 원하길 바라는 것이었다. 


 끝내 그들은 죽음을 함께했다. 외딴 시골마을에서 여생을 보낸 그들에게 남은 것은 사랑하는 노견의 안락한 죽음과 그녀가 간절히 희구하던 토마시의 나약함이었다. 실제로 그는 많이 나약해져 있었으며 더 이상 이전의 가벼운 삶을 살아가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자신의 사랑에 대해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한 행동들이 실제로는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를 망쳐버렸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에게 자신이 그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렸으며 그의 인생의 모든 악의 근원은 테레자 본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고, 삶에서 임무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지 아느냐고. 

그렇다, 그는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경중에 있어서 옳고 그름은 중요치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단 한번 주어진 인생 속에서 우리는 선악이 아닌 최선과 차선만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임무가 없는 그는 한없이 가벼운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무거운 존재이다. 가벼운 삶 속에서도 이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상황과 가치가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그를 끝없이 끌어내린 테레자나 가벼움에서도 테레자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토마시나 삶이 늘 사랑으로 채워져 있었음은 분명하다. 


키치란 무엇인가?

 키치를 빼놓고서는 이 책에 대해 논할 수 없다.

키치란 한마디로 가벼움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즉 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자 미학적 이상이다. 19세기 중엽에 독일에서 파생된 단어로 인간이 자신의 시야에서 본 인간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함을 뜻한다. 

자유로운 예술가인 사비나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반발보다 더욱 거세게 대항했던 것이 바로 '키치'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허황,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는 우리의 아름다움에 취해있는 환상, 하지만 늘 인간존재의 한 부분인 키치.

단어의 의미풀이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 키치란 개념은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우리 시각의 판별이 얼마나 무가치했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가벼운 것을 멀리하나 무거운 것이 왜 무거운지 모르고 맹목적으로 공산주의 지도자를 신봉하는 국민들과 미소를 지으며 아랫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지도자, 키치를 경계하면서도 자신을 챙겨주는 노부부에게서 이상적 키치를 비춰보는 사비나.

그들의 행동이 가볍냐 무겁냐를 구분하는 이 자체도 사실은 키치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한 키치란 이 소설의 전반을 표현하는 핵심 단어라고 생각했다. 



되풀이되지 않는 삶 그리고 실존


우리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데서 우리는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니체의 영원회귀사상과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둘 다 시선이 이상을 향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원이 되풀이된다는 것이 말 그대로 하나의 사상이 것은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의 반증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동굴 너머에 모든 것의 원형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속한 세상이 동굴 안에 갇힌 삶이라는 반증이다. 그렇다면 이생에서의 삶은 정말로 가볍고 무의미한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삶은 우리에게 단 한번 주어진다. 

저자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양자택일의 순간에 놓인다면, 

한 번뿐이기에 가볍게 살 것인가,

한 번뿐이기에 무겁게 살 것인가.


우리가 실존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의 존재에 집중하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되돌아갈 수 없으니 최선을 다해 살아보는 것은 어떠할지 생각했다. 

가벼운 삶 이라지만 끝내 무거운 사랑을 한 두 연인처럼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진정으로 사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어디를 향하던지에 상관없이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라 결론지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에서의 패배와 이를 알리는 퇴각의 북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