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고도는 누구인가.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대체로 의미가 없다. 구두에 관한 이야기, 나무에 목을 매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이야기, 나뭇가지에 대한 이야기 등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고도를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화로 짐작해 보건대 막연한 기다림, 탄원, 일종의 기도를 보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얼마 가지 않아. 포조와 그의 노예 럭키가 등장한다. 그들 간의 대화도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
포조는 럭키를 학대하고, 럭키의 눈물에 대해 ”그건 내게 감동을 주려는 거요, 버림받지 않으려고.”라고 답한다.
이 비정상적인 대화와 상황은 여전히 독자에게 불친절한 의미를 전달한다.
이후 소년이 고도 씨의 전갈을 들려주었다.
“오늘은 못 오지만, 내일은 반드시 온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그다음 날도 고도는 오지 않았다.
역시나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목이나 매자고 디디는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태 그랬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디디, 우린 늘 이렇게 뭔가를 찾아내는 거야. 그래서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구나.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막연한 기다림을 지속하다 보면,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작가는 “내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고도에 대한 해석은 오롯이 독자들의 몫이라는 얘기다. 수감자들에게 이 내용을 연극으로 보여줬을 때는, 모두 극찬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고도를 ‘희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또 혹자는 이걸 보고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고 한다. 보는 이마다 다른 평을 내는 것도 고도의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나 또한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도 매우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고도가 무엇이라 답하지는 못하겠으나, 나는 고도를 꽤 오래 기다리고 있다.
고고와 디디처럼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에 희극과 비극이 적절히 섞여있어서 그 사이를 고도가 파고들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고통 속에서도 고도를 찾고 기쁨 속에서도 고도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고도가 오지 않으면? 목을 매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고도가 오면
그땐 살게 되는 거라는 디디처럼 고도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