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필름이 끊긴 내가 한 짓은

지하주차장에서 춤을 췄다고? 대리기사를 괴롭혔다고?

by 찌니

입안이 텁텁하다. 역한 술냄새가 날 것 같아 입을 열 수가 없다. 얼굴 피부가 풀 먹인 옥양목처럼 뻣뻣하게 땅긴다. 지워지지 않을 잔주름이 빗금처럼 그어질 것 같다. 이 모든 느낌이 씻지 않고 잠들었다는 증거들이다. 다행히 머리는 지끈거리지 않고 속도 괜찮다. 역시 술을 마실 땐 푸짐하고 좋은 안주를 먹어줘야 한다. 그리고 허물없이 좋은, 무슨 짓을 해도 염려가 되지 않는 이들과의 자리여야 하고.


그나저나... 여긴.... 어딘가... 내가 집에 제대로 오긴 온 건가...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려 본다. 익숙한 천장의 낯익은 벽지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소파 위에 누워 있다. 익숙한 온도 익숙한 느낌 익숙한 냄새..... 내 집이 맞군... 내가 집에 무사히 왔네... 어떻게 왔을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디서부터 필름이 끊긴 긴가... 그토록 경계했건만...


주당 네 명이 모였지. 모임을 주선한 H가 하루종일 만날 장소와 메뉴를 놓고 즐거운 고민을 하더니 최종적으로 심야스테이크집과 김경자소문난 대구왕뽈찜집을 내놨다. 올해부턴 술을 좀 자제하기로 했으니 심야스테이크집에서 만나 우아하게 보내 보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막판에 한 명이 뒤집으면서 기다렸다는 듯 대구왕뽈찜집으로 표가 쏠렸다. 그러니까 모두 은근히 술을 자제할 맘이 없었던 거다.


나와 맞먹는 주당 M이 손녀와 놀다가 발가락이 부러져 깁스를 하고 절뚝이며 나타났다. 빨리 회복해야 하므로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더니 윤기 좔좔 흐르는 시뻘겋고 먹음직스럽고 푸짐한 대구뽈찜에 소주가 나오자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우리가 첫 잔으로 소맥을 말아 한 잔씩 시원하게 마시고 나니까 M이 환한 얼굴로 잔을 내밀며 말했다.

"방금 병원에 전화해 봤는데 의사 선생이 일주일이 지났으므로 술 마셔도 된디야...조금..."


네 명이 뽈찜 중자와 낙지파전과 볶음빕 2인분을 해치웠다. 식탁에 빈 술병이 즐비했다. 빈 병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우리는 뿌듯해했다... 아직... 죽지 않았어 우리....

다들 알맞게 취해서 밤의 거리에 나왔다. 커피숍과 호프집을 늫고 아주 잠시 의견이 엇갈리는 듯했지만 결국 호프집으로 고고~~

호프집에서도 맥주파인 H만 맥주를 마시고 나머지는 소주를 마셨다. 안주는 구수한 풍미와 함께 국물이 끝내주는 바지락술찜. 그때쯤엔 자제해야지 하는 마음도 없어졌다. 술이 자꾸 들어갔다. 웃고 떠들고 마셨다. 가까운 테이블의 젊은 사람들이 가끔 우리를 돌아보았다. 남의 시선에 취약한 H가 자제하자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소용없었다.

걔 중엔 '나이 든 사람들이... 정말 꼴불견이야... 우리는 저렇게 나이 들지 말자...' 그러면서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겠지. 또 누군가는 집에 들어가 애꿎은 자기 엄마에게 그 아줌마들처럼 그렇게 무식하고 교양 없이 살지 밀라고 눈을 흘겼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것들아 이해한다 나도 너희들 나이쯤에 장소 불문 유난히 시끄러운 아줌마들 보면 그렇게 생각했기든. 그런데 난 지금 여기 이렇게 앉아 있지... 지금 거기 앉아 있는 너희들도 곧 내 자리로 밀려나 앉을 거고... 그러니까 우리의 모습은 너희들의 미래 모습이라는 거지... 우하하...


거기까지가 내 기억의 전부다. 부르스타 위에서 바글바글 끓고 있던 바지락술찜과 또 한 두 병씩 쌓여가던 빈 병,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주위의 한 두 테이블...


기억을 짜내 보았다.


대리기사를 불렀고... O의 차에 모두 탔고... 그리고...





옷은 실내복으로 다 갈아입었고 나는 거실의 소파 위에 누워 있다. 거실 바닥을 본다. 널브러진 옷가지들이 없다. 어제 매고 갔던 크로스백도 엎어져 있지 않고 소파 밑에 얌전하게 놓여 있다. 벗어재낀 양말짝도 반은 뒤집힌 바지도 보이지 않는다. 과음 후의 아침이면 종종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인데... 남편과 아들이 별말 없이 출근한 거 보면 나는 어젯밤 멀쩡했던 거야. 장하다 장해...

코트가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좀 풀려서 패딩 대신 코트를 입었는데... 그렇다면 얌전하게 옷을 갈아입고 누웠나 보군... 느낌상 씻지는 않은 것 같고... 코트는? 옷걸이에 걸어 장롱에 넣었나? 내가 그 정도로 멀쩡했나? 약간 의심스럽다. 거실에 누워 있는 나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다. 설마 어디에 벗어던지고 온 건 아니겠지... 나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장롱문을 열어보았다. 코트는 옷걸이에 얌전하게 걸려 있다. 뭐... 별로 취했던 건 아니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주방으로 가 본다. 식탁 위에 스팸 선물세트와 참치 선물세트가 펼쳐져 있다. 기억이 날듯 날듯 하다. 어? 명절선물 들어왔네... 지난번 명절에 들어온 거 다 먹어가는데 잘됐다...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내용물과 포장을 분리해서 정리한다.


커피를 내리는데 카톡이 요동을 치면서 어제의 사진들이 마구 올라온다. 여러 장 한꺼번에 올라온 사진을 본 나는 기겁을 한다.

뭐야 이거... 내가 왜 이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긴 코트자락을 휘날리는 나의 우스꽝스러운 포즈의 사진들이다. 두 팔과 두 다리와 크로스백까지 나의 통제를 벗어난 듯 제 멋대로 놀고 있다. 저게 나야? 나 맞아? 나는 사진을 확대해서 보고 또 본다. 흔들리고 뭉개졌지만 나의 모습이 확실하다. 내 앞이나 옆엔 O가 있는데 말리는 것도 같고 같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다. 몇 대의 주차된 차들이 배경으로 서 있고 지상을 떠받치고 있는 굵은 시멘트 기둥도 보인다.


'한 밤 지하주차장에서 춤추는 너의 모습이다...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을 찍었어야 하는데... '


M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내가? 내가? 미쳤나... 이거 완전 미친년인데... 왜 그랬으까 왜...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이...


'우리만 보기 아까웠다... 역시 춤꾼이야... 덕분에 엄청 웃었다. 웃겨 죽는 줄.... '


'그뿐인 줄 아냐? 차 안에서는 7080 노래를 신나게 불러재끼더니 갑자기 바다에 가자고, 자기는 이제 백수여서 가도 된다고, 너네들도 다들 개인사업 자니까 괜찮지 않냐고... 바다로 가자고 바다로 가자고 우리한테 생 난리를 치다가 안 먹히니까 대리기사 아저씨한테 바다로 가자고, 다 책임질 테니까 바다로 방향을 잡으라고 얼마나 성화인지... 그 대리기사 아저씨 엄청 힘들었을 거다 아마... 우리가 대신 미안하다고 자꾸 사과했잖아... 괜칞다고 재밌다는 듯이 계속 웃기는 하셨지만... 속으로는 여편네들이 ... 하면서 욕을 했을 수도... '


아... 내가 그랬다고? 그런 짓을 했다고? 까맣게 정전된 기억의 저편에서 내가 그랬다고? 카톡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 기억 속을 뒤집고 또 뒤집어 본다. 완전한 어둠뿐이다. 이렇게 깜깜할 수가 있나... 그래도 집중해서 기억해 내려고 하면 어렴풋이 한 두 장면쯤 떠오르기도 하는데 주차장에서 춤춘 기억은 그 어떤 순간적인 짧은 영상도 떠오르지 않는다. 완전히 연소되어 단 한 점의 재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필름.

O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한다. H는 맥주만 먹는 친구라 웬만해서는 아주 취하지는 않고 M은 발가락 때문에 많이 마시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동안 잘 자제해 왔는데 어제 완전 터져버렸나 보다... 눌러 뒀던 것이 터져버렸어... 다시 누를 거다... 이번엔 절대 터지지 않도록 아예 봉해버릴 테닷!


짐짓 스스로 엄포를 놓아 보는 나.


'네가 그러면 재미없는데... 술 마신 다음날 이렇게 낄낄거리는 것도 모임의 마지막 이벤트야... 그래봤자 앞으로 10년 정도 이렇게 다 함께 놀 수 있으려나... 일부러 단축시키지는 말아 주... '


이 이기적인 것들! 나 기억이 안 난다고... 필름이 완전 끊겼다고... 알콜성 치매... 블랙아웃... 날 걱정해 줘야 되는 것 아냐?


짐짓 섭섭해 하는 듯 찔러보는 나.


'진짜 하나도 기억이 안 나? 그러면 안 되는데... 그 정도로 취해 보이지는 않았어...넌 너무나 유쾌하고 즐겁고 건강해 보였거든... 그래도 필름이 끊긴건 조심하라는 뜻이니 조금만 자제하자 조금만.... 진짜..'


그렇게 하자고 실천 가능성이 희박한 결의를 또 한번 다져 본 우리.


어쨌거나 필름이 끊어진 걸 제외하면 그 어떤 음주의 후유증도 없었다. 역시 나의 아버지는 술에 강한 당신의 체질을 나한테만 물려주신 게 확실하다. 두 오빠를 제치고 나한테만 주셨다. 감사해야 할까 원망해야 할까...





오후 늦게 키친타월을 구매하려고 쿠팡 앱에 들어갔더니 며칠 전 주문한 아웃도어 옷을 어제 배송 완료했다는 알림이 와 있었다. 어젯 밤이란 필름이 끊긴 문제의 그날이다. 그 날은 먼저 귀가한 남편이 문앞에 배송된 것들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자정 넘어 귀가한 나는 선물로 배송된 참치와 스팸 세트를 보고 좋아했을 뿐 다른 배송품은 없었다. 아니 없었던 걸로 기억되었다. 집안을 뒤지고 문 밖도 살펴보았다. 그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다른 집에 배송되었나... 가끔 그런 경우도 있으니까...쿠팡 고객센터에 문의 해야겠네...

고객센타에 문자를 입력시키려다가 혹시나 싶어서 남편에게 전화했다. 혹시 어제 내 옷 하나 배송된 거 못 봤냐고 물었다. 남편은 하나 오지 않았냐고... 어제 입어보지 않았냐고... 입고 거울 앞에서 이리 저리 살펴보지 않았냐고 했다. 나는 내 필름 끊긴 걸 남편이 눈치챌까 봐 아 맞다, 고 얼버무리고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

내가 입어 봤다고? 세상에나... 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입어본 옷을 어떻게 했을까? 빨래통에 넣었나? 장롱에 넣었나? 행거에 그냥 올려놓았나? 어디 구석에 떨어져 있나?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옷이 나온 것은 나의 윗옷이 들어있는 장롱 안이었다. 얌전하게 잘 개켜져서 놓여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색이라 처음엔 발견하지 못했고 두 번째로 뒤졌을 때에야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남편도 내가 그렇게 취한 상태인걸 몰랐던 거다. 나는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도 태연하게 내가 할 일을 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나는 잠깐 좀 심각해졌다.


그래도 술은 아직 나의, 아니 우리의 작은 해방구다. 짧은 여행이며 잠깐의 일탈이다.

어쩌란 말인가...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 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 수잔 손택 -


저 유명한 '수잔손택'의 독서에 대한 짧은 말이다. 작가에게 실례가 안 된다면 나는 여기 '독서'를 '술'로 대치해 본다.

술은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조금도... 어색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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