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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Mar 06. 2024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왜든 글을 쓴다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 '봄밤'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시 '봄밤'은 김수영 시인의 시인데 권여선 작가의 '봄밤'을 읽은 후에는 '봄밤'에 나오는 알코올중독자 영경이 봄밤에 요양원을 빠져나와 편의점 앞에서 술을 물처럼 마시다가 술에 취해가며 읊는 장면과 함께  생각난다.  처음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읊다가  점점 퍼져가는 알코올과 함께 시를 읊는 목소리도 점점 커져가고...나중에는 거의 울부짖듯이 읊게 된... 봄밤...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 말 라...애 타 도 록  마 음 에...서 둘 지... 말...라...


    봄밤 - 김수영 -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나는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오오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권여선 작가의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은 2023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이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작가가 토지문화관에 머무르면서 소설을 쓸 때 결코 완성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던 소설을 오래된 일기가 구원해 주었다고 한다. 그 오래된 일기 속에는 다음과 같은 사슴벌레식 문답이 등장한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 ㅂ작가가 어젯밤 방에서 커다란 사슴벌레를 발견하고 어찌어찌 처리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간사님이 지나가다 듣고 깜짝 놀라 방에 벌레가 많아요, 물었다. ㅂ작가가 큰 사슴벌레 한 마리가 들어왔다고 하니 간사님은 음 별거 아니군 하는 얼굴로 그럴 땐 비닐봉지에 담아 바깥에 놓아주면 좋다고 가르쳐 주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하더니 ㅂ작가가 방충망도 있는데 도대체 그런 큰 벌레들은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묻자 간사님이 득도한 듯 인자한 얼굴로, 어디로든 들어와요,라고 대답했다. 벌레들을 대변하는 듯한 그 말을 듣고 벌레들이 참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쿨하게 대답하는 사슴벌레들의 무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식의 문답이 얼마든지 변주 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물으면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지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물으면 강쳘은어떻게든 단련됩니다, 하는 식.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왜든 글을 쓴다. 우와, 대단하지 않은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친구들은 대학 때 같은 하숙집에 살면서 친해진다. 상냥하고 조심성이 많으면서도 열정적인 '정원' 큰언니처럼 친구들을 챙겼던 '부영' 예의 바르고 인내심이 강했던 '경애' 소설 쓰는 반(半) 주정뱅이 나(준희). 이들은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강촌에 여행을 가서 사슴벌레식 문답을 하게 된다. 강촌행이 있은 지 십 년 후, 교사생활을 접고 연극판에 뛰어들었던 정원이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다시 십 년 후 운동권이었던 경애가 동지였던 부영과 부영의 남편 두진을 배신했다. 이 사건으로 두진은 팔 년 옥살이를 하고 부영은 쓰러져 뇌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 모임 소식을 둘에게 알렸으나 경애도 부영도 답변이 없다.


  이들이 나눈 사슴벌레식 문답은 다음과 같다.


너는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끊고 사냐? 우리가 어떻게든 관계를 끊고 살아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어떻게든 이렇게 됐어

어떻게 미안하지가 않아?  어떻게든 미안하지가 않아

너 어떻게 이러냐?  니가 어떻게 이래?  나 어떻게든 이래,  내가 어떻게든 이래.


  이 소설의 리뷰를 쓴 양윤의(문학평론가)는 이들이 나눈 사슴벌레식 문답을 이렇게 해석했다.


  ---그러니까 사슴벌레식 문답은 네 사람의 만남과 이별을 예견하고, 이들의 앞에 마련된 가혹한 운명을 보여주거나 배신하려는 의지를 폭로하는 대화법이다. 질문을 반복해서 그 말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한편으로, '든'을 덧붙여 새로운 뉘앙스를 만들어 내는 것 - 이로써 인물의 내면이 폭로되고 인물의 현재가 설명되거나 혹은 미래가 예비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저 문답법의 주인공인 사슴벌레는 '나' 자신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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