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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Oct 10. 2024

친구들과 횡성 고구마를 캐왔다

달다... 희한하게 달아... 어렴풋이 달아...

베란다에서 햇볕 샤워중인 고구마들

지난 토요일 친구 경에게서 일요일 강원도 횡성에 고구마 캐러 가지 않겠느냐는 전화가 왔다. 고구마밭은 남편 친구의 엄마가 농사지은 것으로 내다 팔기엔 소량이고 가족들만 먹기에는 대량이라 내려와서 캐갈 수 있으면 캐서 가져가라고 했단다. 특히나 요즘 허리가 아파 물리치료 중인 친구 희가 허리에 복대를 하고서라도 가고 싶어 한다고, 건강하고 힘 좋은 내가 같이 꼭 내려가서 희의 몫까지 캐 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의리를 내세운 협박을 해 왔다. 덧붙여 희는  계절과 날씨에 민감하니 꼭 고구마가 목적이 아니라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어디든 떠나고 싶어 하는 것 아니겠냐고도 했다.  맞는 말이다. 무엇보다 9년 전 남편을 췌장암으로 먼저 보낸 희는 우리에게 아픈 손가락이니까.


그날 우리 집 식탁에는 쿠팡에서 구매해서 쪄 먹다가 남은 고구마가 두 개 남아 있었다. 1.5킬로에 8470원,  번째 구매였다. 우리 집 두 남자는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고 나만 좋아해서 소량으로 사 먹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고구마밭까지 내려가 대량으로 캐서 올 필요까진 없었으나 친구 희를 생각해서, 그리고 가을 나들이 삼아 가기로 했다.


경의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일요일 아침 일찍 강원도 횡성으로 출발했다. 밭에 일하러 가는 일일 노동자들 답게 대충 입고 바르고 온 티가 역력했다.  희는 지난밤 잠이 오지 않아 오밤중에 일어나 만들었다는  약밥을 한 찬합 꺼내놓았다. 어디 갈 때마다 기다리는 싱거우면서 고소한 희표 약밥을 먹으며 잡다구리 한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차는 횡성의 어느 작은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우항리였다. 경의 남편은 차를  마을 입구에 있는 하나로마트 앞에 세웠다.  경 부부가 고구마밭주인에게 줄  미역과 한우국거리와  음료수를 사서 나왔다. 


집들은 모두 현대식으로 반듯반듯하고 깨끗하고  동네는 조용했다.  시골 동네에서 흔하게 목격되는 허물어져 가는 빈 집은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여유가 된다면 세컨 하우스로 갖고  싶을 정도로 아담하고 예쁘고 마당 넓은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름진 얼굴에 뽀얗게 화장을 하시고 우리를 맞이하는  고구마밭의 주인인 경의 남편 친구의 어머니는 아흔 하나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했다.   집 가까운 비탈에 고구마밭이 있었는데 우리 외에 대여섯 명이 벌써 고구마밭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 이랑 정도 파해쳐진 밭엔 불그스름한 고구마가 여기저기 땅속에서 끌려 나와 있었다. 우리가 밭에 안내되어 갔을 때 사람들은 접이식 플라스틱 탁자에 둥글게 모여 서서 막걸리와 족발을 먹고 있었다. 경의 남편 친구의 형, 누나, 매형 등 멀고 가까운 친척들이라고 했다. 우리에겐 호미와 장갑과 낫이 주어졌다. 그리고 농촌 체험 온 학생들처럼 짧은 교육을 받았다. 흙만 파헤쳐 고구마만 캐면 되는 게 아니라 먼저  밭을 뒤덮고 있는  고구마넝쿨을 낫을 이용해서 걷어 내고 그 아래에 밭이랑을 싸고 있는 시커먼 비닐도 벗겨내야만 했다.  예상보다 거친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먼저 작업을 시작한 반대편 끝의 두 이랑이 주어졌다. 경과 경의 남편이 낫을 들고 엉킨 고구마넝쿨을 걷어내는 작업을 맡고  내가 걷어낸 넝쿨 아래 드러난 밭이랑 감싸고 있는   시커먼 비닐을 둘둘 말면서 나가는 작업을 맡았다.  그러면  엉덩이에 매단 둥그런 의자에 앉은 희가 드러난 밭이랑의 흙을 호미로 파해쳐 땅 속 고구마를 캐냈다.  땅속 깊이 묻혀 보이지 않는 고구마를 상처 없이 캐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잘못하면 호미 끝에 붉고 싱싱한 고구마가 찍혀버린다. 에구머니 어떡해... 하는 안타깝고 미안한 비명이 저절로 나온다. 고구마 줄기와 비닐을 걷어내는 작업을 서둘러 끝내고 모두 고구마를 본격적으로 캐기 시작했다. 고구마는 땅속 깊숙이까지 박혀 있어서 호미질 몇 번으로는 되지 않았다. 다행히 날씨는 흐려 이글거리는 햇빛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하는 노동으로 우리 모두는 금방 땀을 줄줄 흘리며 헉헉거렸다.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다리야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래도 땅속에서 나오는 고구마는 붉고 실해서 재미가 붙었다. 유난히 큰 고구마가 나오거나 한 줄기에 여러 개의 고구마가 줄줄이 딸려 나오거나 모양이 좀 이상한 고구마가 나올 때마다 과장되게 탄성을 질러댔다. 아무래도 우리 하는 모양이 서툴러 보였는지 경의 남편 친구의 형이라는 분이 우리에게 다가와 조금이라도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과 삼지창 같은 농기구를 주었다.  그걸 땅 속 깊숙이 일자로 박은 다음 힘을 주어 삼지창의 손잡이를 아래로 누르면 단단히 뭉쳐져 있던 밭이랑의 흙이   무너지기 직전의 오래된 건물 담장처럼 허술해졌다. 그렇게 허술해진 흙을 호미로 파헤쳤다. 당연히 삼지창을 이용하기 전보다 호미질이 쉬웠다.  작은 일에도 농기구의 역할이 이 정도이니 농경사회에서 농기구의 발전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한참 일에 재미와 속도가 붙었을 때 경의 남편의 친구의 어머니가 뒷짐을 지고 숨을 몰아 쉬며  올라오셔서 점심을 해 놨으니 먹고 하라고 했다. 점심때가 된 모양이었다. 우리가 정중히 사양하자 당신은 밥 해 먹이는 걸 가장 재미있어한다면서 청국장에 나물 몇 가지 지만 먹고 하라고 번이나 권했다.  배도 고픈 터에 나는 속으로 어르신이 한 시골밥을 먹고 싶었지만 누구보다 예의를 중히 여기는 친구들은 끝까지 사양했다. 고구마 캐서 가져가는 것도 고마운 일인데 점심까지 얻어먹을 수는 없다고, 그리고 우리에겐 서둘러 작업을 끝낸 후 시내에 나가서 유명하다는 횡성 한우갈비탕을 사 먹을 계획이 있었다.


우리의 작업은 그래서 쉬지 않고 진행되어 거의 세 시간 만에  주어진 두 개의 랑에서 고구마를  10 키로 상자 아홉 개를 가득 채웠다.  막 캔 붉은 고구마로 차의 트렁크를  가득 채웠지만 우리의  배는 텅 빈 곳간... 그 유명하다는 횡성 한우로 만든 갈비탕을 찾아 서둘러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전의 작별인사 자리에서 한 달 정도 숙성된 다음에 먹어야 진짜 맛있다는 조언과 내년엔 아예 고구마 심으러도 오라고 하셔서 다 함께 웃었다  

 갈비탕을 찾아 나선 길에 한우축제장에 잠깐 내렸다. 넓은 축제장 가득 주차된 차량들만 빼곡할 뿐 축제장은 썰렁했다. 거기다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축제 분위기를 더욱 썰렁하게 만들었다. 온 나라 구석구석 축제가 한창이다. 가히 축제의 계절이다. 경의 남편의 친구가 귀띔해 준 식당의 갈비탕은 한 그릇이 23000 원. 비싼 만큼 고기가 연하고  부드럽고 국물도 끝내줬다. 횡성한우라는 브랜드가 이름값을 했다.


갈비탕을 먹고 나오니 비가 제법  내렸다. 고구마 캐다가 비 내렸으면 어쩔 뻔했냐고 우리가 점심시간도  건너뛰며 서둘러 작업을 마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이냐고 잠시 자화자찬의 시간을 가졌다.

원주 반계리 800년 된 은행나무

돌아오는  길엔 원주 반계리 800년 된 은행나무를 보려고 차를 돌렸다. 나무는 오래된 고목나무 답지 않게 크고 싱싱하고... 한마디로 웅장한 느낌이었다.  아직은 푸른 잎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풍성하기까지 했다. 가까이 가 보니 나무는 한 그루가 아니라 서너 그루로 나뉘어 있었다. 한 뿌리에서 나와 갈라진 것 같았다. 800년에서 1000년으로 추정된다는데   푸르른 싱싱함에 측정을 잘못한 거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무가 노랗게 물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미리 감탄하며 그려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발 빠르게 검색해 본 경의 남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나무로 손꼽힌다고 말해 주었다.

반계리믄행나무를 보려고 한 시간 여를 지체한 것은 경의 남편의 의견이었다. 경의 남편은 어떤 목적지에 갈 때마다 오고 가는 길 주변의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해서 꼭 들른다고 한다. 그런 남편 덕분에 경은 우리나라 방방곡곡 거의 안 가 본 곳이 없단다. 오로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두르는 내 남편과 참 다르다. 경은 그런 남편 때문에 피곤하다  하고 나는 그런 경을 부럽다 하고... 그러다가 우린 슬그머니 화재를 바꿨다. 희... 니 남편은 어떤 편이었어?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나와 희가 두 박스 씩 갖고 나머지 5박스는 식구 많고 인사치레 할 곳 많은 경이 갖기로 했다. 나는 한 박스를 경이나 희에게 줄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거의 나 혼자 먹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베란다에서  열흘 정도 말리고 숙성시켜 잘 보관하면 겨울 내 먹을 수 있다기에, 그리고 맛도 엄청 좋을 거라고 몇 번이나 장담하는 고구마밭 가족들의 말도 있고 해서 그냥 두 박스  다 갖기로 했다.

아들이 차로 데리러 와서 편하게 귀가했다. 베란다에 신문지를 깔고 고구마를 펼쳐 널었다. 고구마에 묻어온 흙들이 떨어지고 날렸다. 막 캔 고구마 맛은 어떨까 궁금해서 몇 개를 쪘다. 찜기에 30분 정도. 막 쪄 낸  뜨거운 고구마를  가르니  밤처럼 희고 슬포슬해 보였다.  후후 불며 입에 넣고 굴리며 씹어 보았더니 밍밍했다. 역시 며칠이라도 숙성이란 걸 시켜야 하나보다... 하면서 우물거리는데 웬걸... 달다... 아주 약하게... 마치 설탕을 아주 아주 조금 뿌려 놓은 듯이... 꿀을 아주 조금 발라놓은 듯이...

캐 오자마자 바로 쪄 본 고구마

나는 큰 발견이라도 한 듯이 톡을 보냈다.


ㅡㅡ얘들아 방금 우리가 캐 온 고구마를  쪄서 먹어 보았거든... 처음엔 닝닝하기만 하더니 조금씩 단맛이... 아주 희미하게 나는 거야... 희한하게 달아... 포실포실하고 어렴풋이 달아... 집중해서 음미하지 않으면 모르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을듯한 아주 미미한 닷맛이랄까... ㅡㅡ


다음날 오후 늦은 시간에도 서너 개 쪄  보았다.  하루동안 베란다에서 햇살 샤워를 한 고구마는 껍질에 쌓인 바깥쪽이 아주 희미하게 노르스름해져 있었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색이었다. 신기했다. 당연히 맛도 어제보다 조금 더 달았다.  

계획에도 없던 고구마 덕분에 올해 가을은 포실포실하고 달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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