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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까지 나홀로 23. 2km를 걸었다 1

by 찌니
그날 여기서부터 시작



토요일은 여동생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내 아들을 결혼시킨 듯 뿌듯하고 홀가분하고 서운하고 끝난 후에는 피곤하기까지 했다. 여동생은 식이 진행되는 동안 몰래몰래 눈가를 찍어내는 모습을 보이더니 식의 종반 즈음 아들과 며느리가 인사를 하러 마주 서자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마주한 며느리인 신부도 울고 무뚝뚝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성격의 제부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내느라 여념이 없고 뒤쪽 하객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울고 언니도 울고 올케언니도 울었다. 저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쩌지 못해 손으로 훔쳐 내거나 손수건으로 닦아내거나 누군가 뒤에서 건네주는 휴지로 찍어 내기 여념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아들을 비롯한 나머지 조카들은 지들끼리 몰래 키득키득 웃었다. 어휴... 또 한 명 우니까 또 따라 다 우네 울어... 여휴 참 못 말린다니까... 어휴 어휴.... 우리 이모들 참... 조카들은 이런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다. 가족 행사나 모임 때마다 꼭 한 번은 목도하는 광경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러려니 하거나 아예 놀리기까지 한다.


기말시험도 끝났고 조카 결혼식도 치른 일요일은 모처럼 부담 없고 여유로운 것 같았다. 그런데 지난 5월 보름 가까이 함께 했던 감기가 또 찾아왔다. 이번에는 코감기였다. 코가 막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누워 보고 저렇게 누워 보고 앉아도 있어 보고 잠깐잠깐 잠이 들기도 하면서 온 밤을 설쳤다.


비가 올 것 같은 흐린 월요일 아침, 다운되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고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갔다. 바람이 습기를 머금고 있는데 그 습기가 습하지 않고 촉촉한 느낌이어서 상쾌해졌다. 흐르는 물을 따라 바람에 춤을 추는 녹지대의 하얀 개망초와 노란 금계국과 보라색 수레국화와 무성한 갈대를 보며 걷고 있으니 오래 묵혀 둔, 꿈으로 남겨 둔 그 도전을 오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한강까지 걸어가 보기. 감기로 몸 상태가 온전치 못하지만 그래서 더욱 해보고 싶어 지는 건 무슨 마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자 마음이 급해졌다. 하던 산책을 멈추고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 코감기약을 샀다. 늦은 아침으로 배를 채운 후 배낭을 꺼냈다. 삶은 계란 세 개와 방울토마토 10알 정도와 물과 읽고 있던 책 '20세기 한국 소설 37, 이문열 최시한 외'과 보조배터리와 여분의 양말과 우산과 손수건 2개를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졸릴 수도 있다기에 감기약은 먹지 않았다. 그리고 바람 속을 걷다 보면 코가 저절로 뚫릴 것만 같아서다. 자, 가보는 거야...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고 가다가다 너무 힘들면 되돌아오면 되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안양천 덕천세월교 밑 이정표에는 '한강 23. 2 km'라고 쓰여 있다. 손목의 스마트워치를 확인한다. 12시 10분이다. 비는 내리지 않지만 먹구름이 잔뜩 몰려들어 있고 바람의 온기와 세기는 아주 적당하다. 걷기에 안성만춤인 날씨다. 큰 비만 오지 않는다면. 나는 그렇게 출발했다. 늘 그렇듯, 느닷없이, 충동적으로.


한 시간쯤 걸어 지난해 여름 걷다가 들렸던 안양그린마루 카페 앞에 도착한다. 카페는 안양천과 굴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날 여기서 더 가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돌아선 곳이기도 하다. 햇볕이 쨍쨍하던 그날 여기서 마신 시원한 아이스커피와 함께 먹은 샌드위치가 생각났지만 들려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처음의 활기와 생기가 약간 떨어져 나갔지만 걷는 걸 잠시라도 멈추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지금부터가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이 되는 것이다.


좀 지친 듯도 하고 지루한 듯도 하여 들국화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잘 듣지 않는 내가 특히 오래 걷거나 러닝 중에 가끔 듣는 노래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나의 마래는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 나의 미래는 때로는 힘이 들겠지...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행진)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 봐...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났나 봐...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 상.... 그것 만이 내세 상....(그것만이 내 세상)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꺼내어 그대 가슴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걱정 말아요 그대)


이어폰으로 들국화의 노래를 들으며 걸으면 내가 혹시 잘못 살고 있는 건가 싶은 불안감과 의구심이 잠시나마 해소되며 마음이 가벼워진다. 특히 나는 이 세 곡을 좋아한다. 나만의 세상에서 나 혼자 행진하듯 살지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인권이 거친 목소리로 응원해 주는 듯하기 때문이다.


가끔 라이더 한 두 명이 바람을 가르며 지나갈 뿐 산책로는 한적하다. 그래서 어떤 대목에서는 목청껏 따라 부르기도 한다. 가끔 코가 간질거리다가 크게 재채기가 나고 기침이 난다. 감기가 나 아직 여기 있다고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다.


기어코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을 꺼내 쓴다. 우산은 휴대용으로 작고 약하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뒤에 맨 배낭을 앞으로 옮겨 맨다. 바람마저 거칠어진다. 우산이 뒤집어질 것 같다. 가는 우산 손잡이를 두 손으로 힘껏 움켜잡고 흐릿하게 뭉개진 앞쪽을 먼 곳까지 바라본다. 잠시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이 있는 쉼터나 다리 밑을 소망하면서.

비를 피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꼼짝없이 비바람 속을 걸어야 한다. 운동화가 젖고 운동화 속에 물이 들어가 양말이 젖고 바짓가랑이가 젖어 종아리에 휘감긴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 긴 바지를 입고 온 것이다. 비바람의 기세는 하나의 방어막인 우산을 뒤집고 나의 맨 몸을 후려치고 싶은 듯 험악하다. 돌아가라고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고 현실을 제발 직시하라고 나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치고 싶은 건가... 그러나 나는 항복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나를 몰아대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나는 모른다. 행진 행진 앞으로 행진하라는 전인권의 거친 목소리인지도.

우묵한 산책로마다 빗물이 고였다가 더 낮은 곳으로 흐르고 한강을 향해 나와 같은 속도로 흐르던 강물은 거센 비바람이 채찍이라도 되는 듯 그 속도가 빨라진다. 녹지대의 푸른 갈대와 흰 개망초꽃과 노란 금계국꽃과 보라색 수레국화는 비바람이 경쾌한 음악이라도 되는 듯 미친 듯이 춤을 춘다. 문득 빗속에서 춤을 추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 상황에서 춤까지 춘다면 정말 미친년이 되겠지... 빗속에서 춤을 주는 내 모습을 상상하자 우산 속에서 한껏 찡그리고 있던 얼굴이 펴진다. 불쾌에서 빠져나와 유쾌해지는 건 쉽다. 유쾌한 상상을 하면 된다. 뒷맛이 좀 씁쓸하지만. 저 멀리 흰색 천막이 흔들리며 흐릿하게 보인다.


두 명의 나이 든 라이더가 천막 속 밴치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다. 우산을 접으며 천막 속으로 들어서는 나를 힐끗 보는 듯하다. 걸음을 멈추니 비로소 다리가 묵직해지며 저려온다. 밴치가 젖어 있어 엉덩이만 살짝 걸치고 앉아 비가 조금이라도 가늘어지기를 기다린다. 시간을 보니 한 시간 정도를 걸었다.


친구 4명 단톡방에 현이 제주의 넓고 푸른 바다와 새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맑은 하늘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올렸다. 내가 한강을 향해 소낙비 속을 걷다가 잠깐 천막 안으로 들어가 비를 피한 그 시간에 현이는 제주의 푸른 바다 앞에 있었다. 30초가량 되는 바다 동영상 아래에는 돌고래를 찾아보라고도 했다.

경과 희가 역시 제주 바다... 제주 가고 싶다... 부럽다... 고래는 못 찾겠다 꾀꼬리... 여기는 소낙비 내린다... 등등의 글을 올렸다.


나는 나의 상황을 올릴까 말까 잠시 망설인다. 말하고 나면 어쩐지 내가 포기하고 싶어질 때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은 그와 같은 이유로, 그러니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나의 상황을 올리고 만다.

'나는 지금 안양천을 따라 한강을 향해 걷고 있다. 한 시간 정도를 걸었고 지금은 소낙 비를 피해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글과 함께 출발할 때의 이정표 사진과 후줄근한 내 모습을 찍어 올린다.

'감기도 걸리고 비 오락가락하는 이런 날 하필이면 이 짓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를 마시라... 나도 잘 모르니까...'라는 글도 함께.


희 : 왕복 48킬로를 걷겠다고?

경 : ㅇㅇ는 왜 그리 힘든 도전을 하는 거야... 늙어가지고... 요즘 들어 골골하더니...

희 : 뭐 지금이 젤 젊을 때이긴 하지 ㅎㅎ

현 : 와우, ㅇㅇ 짱!!!

경 : 씩씩한 ㅇㅇ... 대단하다 대단해...

현 : 묻지 말라니 궁금하네... 왜 하필 오늘이야?

경 : 왜긴 왜겠어... 날을 잘못 잡은 거지 ㅎㅎㅎ

나 : 비 그쳤다. 이제 또 걸어봐야지... 난 아무래도 고통을 즐기는 마조키스트인 듯 ㅋㅋㅋ


잠시 후 비가 그쳤고 나는 망설임 없이 천막을 나서 젖은 길 위를 걷는다. 아주 가끔 나처럼 혼자 걷는 사람이 있다. 배낭을 메고 마주 걸어오는 여자도 있지만 나처럼 한강 쪽을 향해 걷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어쩌다 사잇길에서 걸어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다가도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길 위에서 오로지, 철저히 거의 혼자였다.


오후 1시 57분. 한강 16킬로 남았다는 이정표. 가끔 말썽을 부리는 왼쪽 무릎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비는 완전히 그쳤고 흐린 하늘은 여전하지만 젖었던 바짓가랑이는 거의 말랐다.


오후 2시 30분. 한강까지 14 키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거대한 다리 밑이 가깝다. 종류도 다양한 크고 작은 색색의 장미들이 반쯤은 시든 채로 도로로 올라가는 넓은 경사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곳곳에 포토존 같은 것도 만들어져 있다. 어디쯤인가 둘러보니 '금천한내장미원'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포토존 의자에 손수건을 깔고 앉는다. 발바닥이 화끈거린다. 신발을 벗고 젖은 양말을 벗는다. 발가락이 허옇게 불어 있다. 젖은 양말을 벗고 양말을 갈아 신는다. 배는 고프지 않은데 힘을 내기 위해서 계란 두 개와 방울토마토를 먹는다. 축축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강물은 쉬지 않고 한강을 향해 흘러가고 나무와 풀과 꽃들은 비 덕분에 더욱 선명하고 싱싱하다.


오후 3시 45분. 철산교 밑에서 또 잠시 쉰다. 다리가 본격적으로 아파온다. 발바닥만 화끈거리는 걸 넘어서 발목과 종아리 전체가 화끈거리고 쿡쿡 쑤셔댄다. 어찌어찌 한강에 도착하더라도 다시 돌아갈 길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오후 4시 33분. 한강까지 9킬로. 광명대교 밑을 지난다. 지금까지 4시간 20분이 걸렸고... 내가 10 킬로 러닝에 한 시간 정도 걸렸으니... 넉넉잡아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하려나... 나의 계산법이다.


언제부터인가 양쪽에 꽃들이 도열한 흙길을 걷고 있다. 흰색 개망초꽃과 노란 금계국꽃과 함께 색색의 코스모스까지 피어 있다. 가을에 피어야 할 코스모스가 여름에 피어서인지 아니면 외래종인 것인지 꽃잎이 유난히 크다. 가녀린 여자를 코스모스에 비유하던 것도 옛말이 된 듯.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간다. 그리고 점점 도심 쪽 녹지대의 경관이 자연에서 인공으로 변한다. 백합'나보나', 무늬억새, 적엽휴케라 등 처음 듣고 보는 꽃들이 잘 관리되고 있는 넓은 정원 안에서 단정하고 질서 있게 피어 있다. 색깔이 곱다 못해 화려하다. 아무리 곱고 화려해도 나는 강가에서 마구잡이로 핀 개망초꽃과 금계국꽃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중간중간에 쉼터로 만들어 놓은 전통적인 정자와 서양식의 파고라에도 드문 드문 사람들이 머물러 있다. 한강을 향해 쉼 없이 흐르는 강물도 어느새 넓고 깊어진 듯 보인다.


강물이 흐르는 왼쪽은 자연이 만든 개망초와 금계국과 코스모스와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오른쪽으로는 세련된 인공의 정원이 펼쳐져 있는 흙길을 걷다가 ㅇㅇ씨의 전화를 받는다. 기말고사 성적 확인했냐는 전화다. 자기는 다 잘 봐서 아무래도 성적장학금도 기대해 볼 만하다는 기쁘고 들뜬 목소리다. 축하한다고 애썼다고 말해주며 집에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고, 나는 좀 망친 것 같다고 말한다. 에이, 언니... 또 엄살... 잘 봤으면서... 그런다.


전화를 끊고 걷는데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길가 꽃들 사이 밴치에 앉아 결국 핸드폰으로 점수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보조배터리를 가지고 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직도 앱에 들어가 뭘 찾고 확인하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한참이 걸린다. < 2화 계속>


#안양천 #한강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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