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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까지 나홀로 23. 2 km 를 걸었다 2

by 찌니


그날 저물녘의 망원한강공원 풍경


방송대 안양학습관에 출석하여 태블릿으로 본 기말시험 네 과목 중 두 과목은 잘 봤는데 두 과목을 망쳐 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현대소설 이해와 감상'과 '소설창작론'은 잘 본 과목이고 그야말로 시험을 치기 위해 억지로 공부한 '우리말의 구조'와 '문학비평론'은 망쳤다. 예상대로 두 과목은 A+. 그런데 망쳤다고 생각한 '우리말의 구조'는 A+이고 '문학비평론'은 C+이다. 망친 두 과목 모두 잘하면 B 정도 나오겠다고 예상했는데 한 과목은 B보다 높게 나왔고 한 과목은 B보다 낮게 나왔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는 예상 점수를 크게 빗나가지 않은 거다. 마치 우주 전체의 에너지는 형태는 바꾸지만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물리학에서의 균형의 개념처럼 말이다. 괜히 안심이 되었다. 저 강물이 결국은 한강에 이르듯이, 그리고 지금 혼자 집에서 멀어지고 있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듯이 말이다. 결국은... 결국은... 모든 것이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씩 궤도를 이탈하는 별도 그렇게 이탈해야만 전체적인 균형이 이루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벤치에 앉아 점수를 확인하고 이런 잡생각에 빠져 있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강물과 산책로 사이 녹지대가 너무 넓고 억새가 높고 무성하여 강물이 보이지 않으면 어쩐지 불안해진다. 나는 강물을 따라 걷기로 했고 강물을 보며 걷는 길 외의 길은 모르기에 강물이 보이지 않으면 길을 잃은 듯하고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되어 두리번거린다. 최대한 강물 가까이 가려고 길을 찾는다. 그러다가 강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반갑고 안심이 된다. 겁 없다고 씩씩하다고 대범하다고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난 이렇게 약하구나, 그렇게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겸손해지기도 한다.


멀리 흐린 잿빛의 하늘과 맞닿아 거대한 우주 정거장 같은 현대식 구조물이 보인다. 좀 더 걸어 가까이 가서 올려다보니 '구일역'이라 쓰여 있다. 오후 4시 55분.


오후 6시 13분. 넓은 공원이 펼쳐져 있다. 강물도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걸어왔나 싶어 뻣뻣하게 굳기 시작하는 듯한 다리를 두드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켜 줄 무언가를 확인해야만 한다.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분리되어 있다. 팥죽색을 입힌 자전거 도로에서 '한강'이라는 글씨와 함께 화살표가 흰색으로 크게 쓰인 걸 발견한다. 아 드디어 가까이 온 건가... 글씨와 화살표만 봤을 뿐인데 너무 반갑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 길을 걷는다. 뒤에서 자전거가 찌르릉 거린다. 아차 싶어 다시 산책로로 돌아온다. 마음이 놓여서인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힘들어 힘들어... 다리를 두드리며 끌며 걷는다. 시간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귀갓길은 절대 걸어서는 갈 수 없겠다는 마음이 굳는다. 그렇다면... 어찌어찌 되겠지...

가수 조용필의 '한강'이라는 노래가 생각나서 찾아서 들으며 걷는다.


한 구비 돌아 흐르는 설움... 두 굽이돌아 넘치는 사랑... 워우워...

한아름 햇살 받아 물그림 그려놓고 밤이면 달빛 받아 설움을 지웠다오... 억년에 숨소리로 휘감기는 세월... 억년에 물결은 여민 가슴에... 출렁이는 소리... 한강은 흘러간다...


노래와 함께 유튜브에서 '한강' 노래를 열창하는 조용필의 젊고 빛나는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면서 걷는다.


목동교 6시 43분. 한강은 가까워 오고 돌아갈 집은 아득하고 불어오는 바람에는 저녁의 내음이 난다. 붉은 노을을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그런 복은 아무나 누릴 수는 없는 법. 사람들이 어느새 많아졌다. 대부분 가벼운 옷차림이거나 출근룩 같다. 퇴근길, 혹은 퇴근 후 집에 들렀다가 나온 한강 근처에 사는 서울 시민들일 터. 나는 안양천 가까이 사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라 여기는데 그대들은 축복에 축복에 축복을 더 더 더한 것임을 알고나 사시는지...


양화교 7시 25분. 폰에서 알려주는 주소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화동 153 - 30. 차들이 오가는 높은 다리의 난간 밑 초록색 공간에 '한강합류점 0.85킬로'라고 쓰여 있다.


드디어... 드디어... 넓고 넓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젖줄 한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영상으로만 보던 나이아가라 폭포를 만난다고 이토록 감격스러울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옆에 끌어안고 감격을 나눌 누군가 없다는 것이 아주 잠깐 아쉽다. 시간은 오후 7시 38분. 7시간 반을 걸어와서 만나지 않았다면 , 해내고야 말았다는 성취감이 함께 하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는 감동. 언제가 산의 정상에 올라가서 만난 붉은 저녁노을에 대해 말할 때 한 친구가 그랬었다. 무슨 그런 고생을 해가며 노을을 봐... 30분만 차 타고 가도 노을 명소 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친구와의 인연은 지금 끝났다.

주소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서구 염창동 221 - 2. 망원한강공원이란다. 7시간 38분을 걸어 마주한 한강은 나에게 잠시 망망대해처럼 우주처럼 넓고 깊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넓이와 깊이와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한복판에 혼자 선 듯 잠시 벅차오르면서 외로워진다. 저 멀리 보이는 게 밤섬이었나...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긴 한강다리는 몇 번째 한강다리인가... 먼 곳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아래를 보니 낚싯대를 드리우고 일정한 간격으로 앉아 있는 강태공들이 보인다.


'드디어 한강 도착'이라는 문장과 함께 사진을 찍어 친구들 단톡에 올린다. 나의 성취를 알릴 곳이 없었다면 더욱 외로울 뻔.


현 : 어머머머 ㅇㅇ야!!! 진짜 진짜??? 대단하다 ㅇㅇ!!!!

경 : 와 진짜 도착한 거야? 진짜? 넌... 정말... 멋지고 대단해!!!


바로 앞에서 아빠와 함께 걷던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들이 산책로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며 어 어... 하길래 나도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본다. 한 강태공이 낚싯줄을 힘차게 되감고 있다. 드디어 수면 위로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가 보인다. 물고기는 잠시 물수제비를 뜨는 것처럼 물의 표면을 팟팟팟팟 끌려 가까이 다가온다. 물고기도 고통을 느끼는 통각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데... 우리는 물고기의 고통을... 즐겁게 구경한다. 물고기는 물고기의 운명을 살고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산다. 고통도 운명의 일부.

그리 크기 않은 물고기여서 낚시꾼의 손길에 실망의 빛이 스친다. 옆에서 함께 내려다보던 아들의 아빠가 메기네 메기...라고 한다. 장어면 좋았을 텐데... 그 말도 덧붙인다. 아들이 아빠의 허리를 휘감으며 장어도 잡혀 아빠? 묻는다. 아빠가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럼... 하고 대답한다. 강물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흘러간다.


그나저나 나는 도대체 이 한강이 얼마만인가 싶다. 젊은 한 시절에는 한강의 유람선도 타 봤고 한강에서 데이트도 했고 친구들과 모여 앉아 술도 마셨고 퇴근 후 괜히 한강에 가 앉아 노을을 바라보기도 했었지. 이제는 어쩌다 차를 타고 한강다리를 건너며 차창 밖으로 한강을 일별 할 뿐. 한강은 여전한데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라네... '한강'노래를 열창하던 젊고 빛나던 조용필 님도...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구나... 그래 그래.. 강물이 내 마음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며 흘러간다.


급 피로가 몰려와 앉고 싶으나 빈 벤치가 없다. 앉아서 쉬는 시간도 있었지만 장장 7시간 30분을 걸어 도착했는데 그냥 일별하고 갈 수는 없다. 아무리 늦고 돌아갈 길이 아득할지라도.

한 벤치가 비길래 냉큼 가서 앉는다. 시간은 8시가 넘어가고 있고 한강대교에 불빛들이 켜지고 그 너머에도 도시의 밤의 서막을 알리는 팡파르처럼 불빛이 돋아난다. 어느새 잿빛의 하늘이 청록색으로 변하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고 오가는 행인들의 형체가 흐릿해지면서 불빛은 더욱 선명하고 화려해진다. 그때서야 나는 네이버지도를 연다.


네이버는 현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염창역에서 집 가까운 지하철역까지는 42분이 소요되며 현 위치에서 '염창역'으로 걸어가는 길을 안내해 주겠다고 한다. 이만하면 복잡하거나 오래 걸리지 않는 교통편이다. 다행이다. 일단 가는 길을 알아 뒀으니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짧은 다리를 걸어 건너편으로 건너가 본다. 강 너머 서울의 야경이 좀 더 가까워진다. 그곳도 빈 벤치가 없다. 운동 동호회에서 나온 듯한 여러 명의 젊은이들이 한 곳에 모여 둥그렇게 서서 몸을 풀고 있다. 자전거 안장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는 남자도 있고 벤치에 붙어 앉아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듯한 커플도 있는데 혼자 긴 벤치에 앉아 강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저무는 강을 배경으로 넓은 밴치에 각각 떨어져 혼자 앉아 있는 뒷모습들이 고즈넉하면서 쓸쓸하다. 하루의 마감이 꼭 떠들썩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 일인 가정이 급격히 늘고 있으니 한강의 저녁 풍경 속에도 혼자인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한 일.

이제 정말 가야지 생각하며 한강을 등지고 돌아서 폰을 열고 네이버 지도와 지하철 노선표를 살펴본다.

그런데 노선표를 보니 염창역에서 네 정거장 뒤가 남편의 직장이 있는 국회의사당역이다. 그때까지 나는 남편에게 오늘의 충동적인 거사를 알리지 않았다. 얼마 전 함께 안양천을 산책할 때 한 번쯤 한강까지 걸어서 가 볼 꺼라고는 했고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서 한강에 도착해 있다는 내 전화를 받아도 놀라지 말라고도 했으나 남편은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계획은 그저 막연하기만 했다. 말로만 끝날 수도 있다고도 생각했다. 이렇게 빨리 이렇게 갑작스럽게 실천하게 될지도 몰랐다.

처음에 톡으로 알리지 않은 것은 중간에 포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서였고 걸으면서는 근무 중인 사람에게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디냐? 어떻게 갈 거냐? 미쳤냐? 이 날씨에... 감기 들지 않았냐... 그런 관심과 걱정을 나는 원하지 않았던 거다.


네이버 지도를 따라 20분 정도 걸어서 염창역에 도착했다. 집에 바로 갈까 전화를 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하고 만다. 벌써 집에 가는 길이라거나 퇴근 후 한잔 중이라면 그냥 혼자 가면 된다. 목소리에 술기운이 묻어 있다. 떠들썩한 소음도 함께 들려온다. 내가 먼저 어디냐고 물었더니 회사 근처라고 한 잔 하고 있다고 한다.

나 지금 염창역이야... 했더니 뭐라고? 어디라고? 되묻는다. 염창역이라고... 좀 더 크게 소리를 낸다.


왜? 무슨 일 있어?


나 오늘 한강까지 걸어왔어...


뭐? 뭐라고? 한강까지 걸어왔다고? 허허.. 참... 장난치지 말고...


저번에 내가 말했잖아... 한 번은 꼭 한강까지 안양천 따라 걸어가 보겠다고...


허 참... 장난치지 말고... 어딘데?


염창역이라고 염창역... 경기도 안양에 콕 처박혀 사는 내가 서울 한복판에 있는 염창역을 어떻게 알겠어?


진짜야?


진짜지 그럼... 술 먹나 보네... 됐어... 그냥 혼자 갈게...


아니 아니... 지금 막 끝내려는 중이야... 국회의사당역에 내려서 기다려


괜찮아 그냥 갈게


술자리 끝났다니까...


알았어 그럼...


얼큰하게 취한 남편이 계단을 뛰어내려와 내가 서 있는 개찰구 앞으로 걸어온다. 잠시 나를 신기한 듯 낯선 여자 보듯이 쳐다본다. 벌어진 입이 쉽게 닫히지 않는다. 장난인 줄 알았다고도 몇 번이나 반복한다.

술자리 지인들에게 집사람이 한강까지 걸어왔다고 했더니 놀라기에 앞서 무슨 나쁜 일을 저질러 집사람이 한강까지 걸어오게 만들었냐고 추궁하더란다.


흠... 그렇게들 받아들이는구나... 싶었다. 남편과 자식이 있는 여자가 가끔은 혼자이기를 원하는 것까지는 이해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에 대한 선입견은 아직도 멀었구나 싶었다. 지금쯤은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인식해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안양역에 내려서 뼈해장국을 먹는다. 이미 저녁과 술을 한 남편은 그냥 맞은편에 앉아 있고 배고프고 힘든 나 혼자 먹는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남편은 소주 한 병을 시켜 따라 준다. 한 잔을 마셨더니 너무나 달고 맛있고 시원하다. 원샷을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또 한 잔을 따라 준다. 뼈에 붙은 연한 고깃살을 뜯어먹으며 남편이 따라 놓은 소주를 또 한 번 원샷하며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혼자보다는 낫네...




#안양천 #한강 #조용필 #산천은 의구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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