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펑펑 왕의 영화들 - <왕과 사는 남자> 관람 후

by 찌니


지난 2월 4일 개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2월 22일 관객 5백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나는 2월 8일에 남편과 함께 관람했다. 웃음과 눈물을 넘나드는 엄흥도 역의 유해진 배우의 연기력은 두 말하면 잔소리고 단종역의 박지훈 배우의 웃어도 처연한 눈빛은 이미 알고 있는 비극적인 결말이기에 보는 내내 마음이 오그라들었다.


단종은 그들이 내린 사약을 받지 않겠다 하고 자신의 목숨을 엄흥도에게 부탁한다.

문밖에서 단종의 목에 걸린 밧줄을 당기는 엄흥도의 얼굴은 능지처참을 당하는 사람처럼 고통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눈의 실핏줄이 터진다. 나으리... 조금만 가면 됩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엄흥도는 그 고통 속에서도 어린 왕의 지극한 공포와 외로움을 어루만진다.

손으로 눈물을 찍어내던 나는 더 이상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 못해 가방에서 재빨리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나 영화는 참혹하고 고통스러웠을 단종의 마지막 모습은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목숨이 점차로 끊어지는 모습뿐만 아니라 죽은 후의 모습조차도 화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웃어도 슬프고 가만히 있어도 처연한 단종의 눈에서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리는 것과 팔이 힘없이 툭 떨어지는 모습만을 보여줬다.


단종은 ‘사약을 받고 자결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과 <세조실록>에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전승에서는 엄흥도 등이 단종의 목을 직접 맸다고 묘사하지만 이는 구전 설화로 정확한 사실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어쨌건 장항준 감독은 고통으로 몸부림쳤을 수도 있는 마지막 단종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슬픔은 밖에 있는 사람들만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연출했다고 말했다. 가시는 장면을 보지 않는 것이 더 애도하는 거라 생각했다고, 목이 졸려서 발버둥 치거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는 애도의 방법이 아니라고.


나는 단종의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이 화면 가득 펼쳐질까 조마조마해하면서도, 젖은 손수건으로 맹맹해진 코를 막고 기다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내가 상상하고 있던 그런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앤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서 조금 미진하고 아쉬운 느낌이 들었는데 며칠 후 그렇게 연출한 감독의 의도를 듣고 고개를 크게 크게 끄덕였다.


영화 관람 후 넷플릭스 드라마 <약한 영웅>을 하루 온종일 봤다. 학생들이 치고받는 학원 폭력물은 좋아하지 않는 내가 감독이 이 드라마를 보고 배우 박지훈을 단종으로 캐스팅했다고 해서 잠깐 보려다가 시즌 2까지 정주행을 해버렸다.


그리고 왕을 소재로 한 영화 중 특히 나를 울린 지난 영화들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왕의 남자, 2005년 개봉, 이준익 감독>


왕을 홀린 조선의 광대를 다룬 영화다. 왕(연산군, 정진영 배우)과 장생(감우성 배우)과 공길(이준기 배우)의 아슬아슬하고 애틋한 동성애적 감정들. 기침처럼 가난처럼 참고 참고 숨기고 숨겨도 결국은 드러나는.


그 마지막 장면. 공길을 지키려다 두 눈을 잃은 장생이 왕이 준비한 마지막 공연을 위해 외줄에 오른다. 만류하던 공길도 반대편 외줄에 오른다. 궁궐 밖에서는 연산을 끌어내리기 위한 반정의 군사들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되겠다며 둘은 웃으면서 외줄 위를 달려 공중으로 솟구친다. 그렇게 외줄을 박차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공길과 장생은 두 마리 새처럼 궁궐의 지붕 위 공중에서 정지된다. 그리고 가수 이선희의 불후의 명곡 <인연>이 장중하면서도 애틋하게 흐른다.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년 개봉, 추창민 감독>


졸지에 왕의 대역을 하게 된 저잣거리 만담꾼 하선(배우 이병헌). 위험천만한 왕노릇을 하면서 불의한 권력에 속절없이 희생되는 약자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점차 대역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백성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명에 대한 사대의 명분만을 강조하는 대신들 앞에서 하선은 참지 못하고 백성들을 위한 진짜 왕의 마음을 드러낸다.


“대체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뭐라? 이 땅이 오랑캐에게 짓밟혀도 상관없다고? 명 황제가 그렇게 좋으시면 나라를 통째 갖다 바치시든가... 부끄러운 줄 아시오... 좋소... 경들의 뜻대로 명에 2만의 병사를 파견하겠소. 하나 나는 금에 서신을 보낼 것이오 홍문관은 적으라 명이 두려워 2만의 병사를 파병하였으나 금과의 싸움을 원치 않는다. 부디 우리 군사들을 무사히 조선으로 돌려보내 주시길 소원한다... 그깟 사대의 명분이 무엇이요 도대체 뭐길래 2만의 백성을 사지로 내몰라는 것이요... 임금이라면 백성이 지아비라고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내 그들을 살려야 되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곱절 백 곱절은 더 소중하오... ”


한 나라의 왕이라면, 대통령이라면...


그 외에 호위무사 도부장이 하선이 가짜 왕임을 알고도 그를 살리기 위해 싸우다가 죽음을 당하는 장면과 도승지 허균이 떠나는 하선에게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깊이 숙여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는 모습이 뭉클한 감동과 함께 눈물샘을 자극했다.



<사도, 2015년 개봉, 이준익 감독>


사도세자는 아비인 영조에 의해서 뒤주에 갇힌 지 7일 만에 죽었다.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단 말이냐 나는 자식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다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목이 메어서 목소리까지 불안정하게) 미 쳐 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내가 임금이 아니고 네가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


이 대사에서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아비이면서 왕인, 왕이면서 아비인 영조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면서 슬퍼했다.


그러나 내가 눈물을 펑펑 쏟은 장면은 사도가 생모인 영빈 이씨의 환갑에 법에 어긋난다는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전의 대례복을 입히고 가마에 태워 행차하는 장면이었다. 물렀거라... 중전마마 행차시다... 물렀거라... 내 어머니... 중전마마 행차시다...


세자의 어미이면서도 궁녀 출신 후궁이라고 푸대접을 받아 온 생모를 가마에 태우고 앞서 걸으며 두 팔을 휘저으며 울부짖는 유아인의 연기는... 가히 압권이었다.



#왕과 사는 남자 #사도 #왕의 남자 #광해 왕이 된 남자 #배우 유해진 #배우박지훈

매거진의 이전글세상 다정한 장애아들 비장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