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길씨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사료 좀 먹어 보겠다고 눈칫밥 먹으며 드나들던 고양이를 그토록 구박하더니.
“아저씨! 그렇다고 계곡에 버리요?”
나는 따졌다.
“그럼 어떻게 해요?”
성길씨는 되물었다.
“묻어야지라이, 그 불쌍헌 새끼를.”
“불쌍하긴 뭐?”
성길씨는 말끝을 흐렸다.
으이구. 내가 말을 말자. 따져봐야 책임회피만 할 뿐이다.
‘그 잘난 추리닝 새것 입으면 다요?’
나는 갑자기 잘 차려입은 그가 얄미워 속으로 말했다.
고양이가 죽든 말든 사람이 추리닝 한 벌 사 입는 것과 무슨 관계람. 나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꼬투리를 잡고 쏴 붙였다. 계속 추궁을 하고 싶었다.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거만하게 걷는 그의 걸음이 오늘은 보기 싫었다. 얄미웠다. 성길씨는 내 친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추리닝을 사 입고 저렇게 폼 잡고 돌아다닌다. 나는 그의 속내를 알고 있다. 그래서 평상시 같으면
“아따! 뭐 좋은 일 있나 보요.”하고 말을 붙였을 것을.
그러나 그가 고양이 새끼의 사후처리를 멋대로 한 것에 대한 분노가 솟았다.
한동안 밥을 먹겠다고 알짱알짱 보일러실을 드나들던 삼색이 새끼가 눈에 밟혔다. 텃밭에서 작물 사이를 드나들던 모습도 생각나고. 곤충들 잡겠다고 뛰쳐 오르던 모습도 생각나고. 나는 그 어디에도 시선을 둘 수 없었다. 계곡 아래쪽으로는 정말 한동안 눈길도 주지 않았다.
새끼를 잃은 어미 삼색이는 집을 나갔다. 기어이 길이 되고야 말았다. 아마 죽은 자식이 계곡에 버려진 것을 목도했을 수도 있다. 삼색이는 남은 자식 중 형아만 데리고 집을 나갔는데, 까불이는 예외였다. 어쩌면 까불이가 따라나서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디에서든 잘 살겄지.’
나는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삼색이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은 안 했다. 내가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도 버렸다. 어떻게 자식을 잃은 곳에서 살 것인가. 삼색이는 어디서 새끼를 무사히 낳았을까. 나는 처음으로 집을 나간 네발 달린 것을 다시 찾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언제부턴가 두발 달린 것들도 찾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