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에서 쏟아져 나온 게나 고둥들이 공원으로 산으로 떠나고 있다. 집 옆 언덕 위 살구 나뭇가지에 걸린 검은 비닐이 깃발처럼 펄럭거린다. 햇빛이 좋다. 빨래나 할까. 세탁기를 돌렸다. 편안하면서 허전했다. 막대기라도 끌고 어디든 가고 싶다. 가고 싶은 곳은 천지인데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없다. 고양이와 평상에 앉아 발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요새 사랑에 빠져 24시간 헤매고 있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반가웠다.
“밥이나 먹게 나와라.”
“ 아따, 그럴까.”
나는 집에서 입던 차림 그대로 부릉부릉 달렸다. 마을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주유 경고등이 들어왔다. 돈 달라는 신호다.
그렇다고 걸어 나갈 수도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세 번 갈아타야 한다.
그러다가는 기다리는 사람이나 가는 사람이나 해가 진다.
차 뽑을 때만 해도 제법 인기 있었던 소렌토 가스 차. 그런데 백미러를 손으로 접어야 한다. 절약하느라 기본스타일로 뽑았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기침도 심하고 옆구리도 깨지고 와이퍼가 유리창을 닦아도 뿌옇다. 피부도 벗겨졌다. 타임 벨트도 갈아야지, 브레이크에 발을 뗐는데도 끄덕하면 빨간불이 들어온다. 어느 날은 핸들이 안 돌아갔다. 나를 위해 달리다가 병을 얻은 것이다. 병명은 '너무 달렸다' 내가 소렌토를 배려하는 것은 장거리를 뛰지 않는 것이다.
오픈할 때부터 다니던 주유소로 갔다. 삼만 원어치 넣어 달라고 카드를 주었다. 계산을 끝낸 직원이 영수증과 카드를 돌려주었다.
시동을 걸었다. 차바퀴가 한 바퀴 돌았을까. 차 뒤를 마구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브레이크를 밟았다. 창문을 열고 내다봤다. 주유하던 선이 빠져 내 차에 매달려 있다. “옴매” 차에서 얼른 내렸다.
“아이고 큰일 났네!”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 눈이 똥글똥글한 직원이 말했다.
“어쩌까.”
나는 성격 급한 나를 탓했다.
“선이 깨지지 않았으면 다행인데.”
직원들은 오히려 나를 걱정하였다.
다행히 강아지 안부를 물을 정도로 일하시는 분들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나는 고장이 났더라도 고치는 비용을 줄이려 불쌍한 척 두 손을 배 위로 꼭 모았다.
“요새 형편도 어려운디 잘 고쳐보세요.”
전화번호와 차 번호를 적어주면서 말했다.
직원은 빠져버린 호스를 끼려고 끙끙거렸다. 이걸 보고 옆에 서 있는 삐쩍 마른 아저씨도 나랑 잘 안다. 그런데 아저씨 얼굴빛이 너구리 똥색으로 변하더니 말이 반 토막 났다.
“연락할 테니까 가서 기다려.”
나는 당황했다.
‘내가 너무 굽신거렸나.’
“빨리 고치고 청구해.”
나와 직원한테 말을 던지고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고 사무실로 휙 들어갔다. ‘참아야 되느니라.’ 뚜껑이 열렸지만 일이 해결될 때까지 참아야 한다고 나를 달랬다.
방이동에 살 때 친한 세탁소 앞에 차를 주차하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송파나루 역에서 전철을 갈아타려고 서 있는데 모르는 전화번호가 떴다.
“여보세요.”
“네, 여기 주유소인데요”
“얼마예요?”
“4만 5천 원이래요.”
머리가 핑 돌았다. 지금 내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벌어도 시원찮을 판에 4만 5천 원 날리게 생겼다. 일단 내일 들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 벨이 또 울었다. 대구에 사는 둘째 오빠한테 전화가 왔다.
“어머니는 시골 산소로 모시기로 결정했으니까, 네가 형님하고 갔다 와야겠다. 날 잡아라.”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인천에 납골당에 계신 엄마를 놓고 식구들끼리 의견이 분분했다. 기간이 끝나면 납골당에서 맘대로 처분한다고 했다. 그래서 혼이라도 돌아가신 아버지와 친구분들하고 고향에서 지내는 게 낫다는 의견과 선산에 묻힌 지 40년 지난 아버지를 고향에서 모시고 올라와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하고 있었다. 막상 엄마를 시골로 결정을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내 곁에 있던 모든 것들이 나한테서 멀어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옆을 떠나버린 강아지 산이, 솔이, 엄마도, 열 발자국 더 멀어져 갔다. 이제 정말 혼자구나.
그렇게 드나들던 강남역 3번 출구를 찾지 못 해 헤매었다. 친구한테 몇 번이나 전화하고 밖으로 나갔다. 길치중에 상길치인 나는 오늘 더 두리번거렸다.
맘에 드는 식당을 찾아 아구찜 안주를 시켜놓고 소맥을 몇 잔이나 들이켰다. 술이 들어가니 ‘4만 5천 원 그까짓 거 갚으면 되고.’
죽네 사네 해도 한순간 눈을 돌리면 세상은 거기서 거기. 어디선가 읽었던 글귀가 떠올랐다. "자살을 안 하는 이유가 인생이 살아 볼 만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죽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아니어서”라고 했다.
나는 폭탄주 몇 잔에 취했다. 집에 가려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강남역 지하상가에 노숙자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나도 저들처럼 박스 하나 깔고 자고 싶었다. ‘인생 머 거기가 거기지’ 잘만한 자리를 찾았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저리 가! 내 자리야!”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는 낄낄거렸다. 화장실 가까운 곳은 좋은 자리라 노숙자들 지정석이었다. 버려진 자리에도 서열이 있다는 걸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눈물이 났다. 설마 4만 오천 원 때문에 눈물이 나고 우울하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을까. 어쩌다 산 밑으로 이사왔지만, 바다에 갇힌 섬처럼 간혹은 쓸쓸하고 때론 외롭고 모든 것이 허망했다. 방이동에서 살 때 씁쓸했던 일들이 자꾸 들렸다. 다 접고 왔는데 신경 쓰게 하는 말들이 나를 흔들었다. 상실감으로 인해 생긴 구멍은 메꾸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여럿이 모일 때 나는 늘 웃었다. 유머를 좋아했다. 실없는 소리도 했다. 나의 사전에 그늘도 없었다. 허나 이 모든 것들이 힘을 잃고 있었다.
그 것들을 다 쓰자니 말이 길어지고 다 쓰면 읽는 사람들이 열받을까 봐 때려치웠다.
광주 유숙이한테 전화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하면서 울기도 했던 친구라 맘 놓고 전화했다.
“뭐 해?”
“응, 밥 먹고 설거지헌다.”
“바람도 불고 맘도 이상해서.”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들어가서 발 닦고 자라.”
“그게 아니라, 할 말이 있어서.”
뚝 ‘여보세요’ 전화가 끊겼다. 나도 저처럼 울고 싶은데. 하지만 나는 울면 안 되는 늘 즐거운 사람으로 굳어버린 것 같다. 야! 이것들아. 비 온다.’
오늘은 슬퍼지고 싶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이 비를 맞고 걸으면 서글퍼 보였다. 나도 그 비 다 맞고 개처럼 떨면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