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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Dec 12. 2024

불량품들의 사계

배추가 꽃 피었다 156

배추가 꽃 피었다       



                                  

비가 그쳤다. 아치울에 사는 친구가 강아지를 데리고 집에 놀러 왔다. 마침 외출하고 돌아온 성길씨가 택시에서 내렸다. 그녀는 마당 가 너럭바위에 앉아 있었다. 성길씨는 너럭바위를 바라다보다 멈칫했다. 그가 들고 있는 투명비닐봉지 속에 배추 모종판과 소주병이 들어있었다.

“어디 갔다 오요?”

내가 물었다.

“배추 다시 심어야겠어요”

성길씨가 대답했다.

“왜요? 잘 크고 있구만.”

“속이 썩었어요.”

성길씨가 손가락으로 배춧속을 제치며 말했다. 나는 내 배추를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배춧속이 든 사람 속이든 썩으면 배린 것인디.”

너럭바위에 앉아있던 친구가 성길씨에 다가오며 말했다.

“어 어쩌다가......”  

“고랑 옆에 심은 것은 조선 배추고요. 추석 때 식구들 오면 먹으려고요. 근데 김장배추가 썩었어요. 배추 덮은 비닐을 땅속에 묻어 물이 차서 썩은 거예요. 이걸 언제 다시 심냐.”

김장배추가 저리 됐으니 성길 씨는 난감해했다. 그런데 왜 나는 웃음이 절로 났을까. 내 친구를 성길씨가 은근히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더 고소했다.

“내 배추는 괜찮지라이?”

내가 보란 듯이 말했다.

“괜찮죠..”

성길씨는 낮게 한숨 섞인 말을 했다.

나는 얼른 가서 내 배춧속을 뒤졌다. 근래 내 속이 편안해서 그런지 배춧속도 아무 이상 없었다. 손에 힘을 주며 쾌재를 불렀다. 올가을 구월 초순에 있었던 일이다.


작년에 성길씨보다 내가 일찍 심었는데도 내 배추 폭이 작았다. 성길씨 배추는 짙은 녹색으로 변해 이파리가 마치 꽃이 핀 것 같았다. 눈만 뜨면 보는 게 텃밭이라 속이 차지 않은 내 배추와 비교가 돼 부러웠었다, 김장이 가까워지면서 내 속은 타들어 갔다. ‘세월이 좀 먹냐? 네 속이 썩지 내 속이 썩냐!’ 배추는 농땡이를 치며 앉아있었다.

올해는 날짜가 십 여일 차이가 났다. 내 배춧속이 성길씨 것보다 일찍 차겠지. 푸하하! 속으로 “앗싸!”를 외쳤다.   

   

성길씨는 집에 놀러 온 내 친구들이 밭에 관심 두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것을 눈치챈 백따구여시 같은 친구들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이것저것 묻곤 했다.

“어머, 어쩜 이리 토마토가 크고 빛깔이 좋아요.?”

“농사는 끝이 없어요.”

성길씨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말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저 말속에 대단한 자부심이 들어있다. 한마디로 농사가 쉽지 않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내 밭은 맨날 삐질 거리고 있으니. 나 들으라는 뜻도 섞여 있다.

성길씨는 내 친구들 코맹맹이 소리에 녹아 자기 손으로 청양고추 몇 개, 상추 몇 장을 따줬다. 그것도 술을 마셨을 때 어쩌다 한번 흔들렸다. 그의 추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흔들림 없는 의지 덕에 부추 끝이 불그스름해지며 하얀 꽃이 피었다.

“아저씨, 저렇게 꽃 필 때까지 두지 말고 나한테 말을 허면 친구들 나누어 줄란 께요.”

성길씨 부추밭은 가을로 들어서자 흰 꽃밭으로 변했다. 나는 부추꽃을 꺾어 물병에 꽂아 식탁에 올려놓았다. 어쨌든 그의 밭은 성길씨 무기요, 자존심이다.   

  

햇살 아래 내 텃밭은 무럭무럭 자랐다. 성길씨 배추는 몸살이 끝나고 겨우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의 배추와 무가 자고 일어나면 성큼성큼 내 밭을 따라잡았다. TV에서 보면 배속 화면을 돌려 식물이 자라는 과정을 보여주듯, 그의 밭이 그랬다. 자고 나면 쑥쑥 자라는 새 나라의 어린이 같았다. 과학적으로 분석을 해야 하나? 한참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늘이 너무 높아 갈 곳을 찾다 왔다며 선희 동생이 놀러 왔다. 그녀는 농담을 잘한다. 마침 성길씨 친구도 놀러 와 밭 가에 서 있었다.

선희는 밭 가에 서서 말했다.  

“어머, 배추 이쁜 것 좀 봐. 자이브 춤출 때 치마로 입으면 딱이네, 어쩜 무는 남자 허벅다리만 해.”

“무슨 치마는 치마여, 한번 흔들면 다 찢어지겄다. 글고 저것이 무냐, 기둥이재. 집 질 때 뽑아다 써라.”

성길씨와 그의 친구가 나를 보았다. 그러든 말든 나는 말을 이어갔다.

“아니, 커도 적당히 커야재.”

내 말이 끝나자 선희는 웃을까 말까 입이 달싹거렸다. 성길씨 친구는 앞산을 바라보았다. 성길씨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성길씨는 내가 비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거 같았다. 나는 분위기를 전환해야 할 거 같았다.

“그래도 쪼간한 것보단 낫재.”

“어머, 언니.”

선희는 내 어깨를 치면서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밤에 성길씨가 옷을 홀라당 벗고 고랑 사이를 돌아다니나?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그럼, 나도 무밭 사이를 뛰어다녀야 하나. 아니면 성길씨한테 깨 활딱 벗고 내 배추밭도 뛰어다녀주라고 해야 하나. 참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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