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그 시절은 선명하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동학사 가는 101 버스 번호가 이토록 머릿속 깊이 박혀 있다. 생각해 보면 이유가 있다. 대전으로 발령받아 둘째 오빠 직장에 다닐 때였다.
그때 나는 알 수 없는 슬픔과 불안이 몰려오면 101번 버스를 타고 동학사를 놀러 갔다. 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일주일 동안 쌓인 찌꺼기와 나라 꼬라지 고민을 털어내려 계곡에서 앉았다가, 산길을 걷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갔다. 나는 산의 매력에 점점 젖어들었다.
나는 항상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내 자리가 아니라는 느낌이 내 강박의 원인 같았다. 나는 강박에 떠밀려 절 안팎을 한 바퀴 돌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절 뒤 숲으로 들어서곤 했다.
숲에는 오직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적막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물에 비친 내 얼굴이 바람에 깨지고 일그러지고 찰랑거리며 마음을 씻어 내렸다.
동학사 비구니들이 법당에서 모여 있는 시간이 오전 11시쯤이었던 것 같다. 비구니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맑고 눈 끝이 부드러워 보였다. 스님들이 법당 안으로 들어갈 때 댓돌 위에 벗어 놓은 하얀 고무신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가을 햇살에 비친 댓돌 위, 하얀 고무신들이 빛이 났다. 나는 그것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니 서늘해지다가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 고무신 코에 새겨진 자기만의 표시를 보고 나는 비구니가 되면 신에 무엇을 새길까 고민했었다.
그 고민을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 어느 날 머릴 깎자고 맘먹고 총무님과 의논했다. 상담이 끝난 후 갑자기 무서웠다. 새벽부터 일어나 밥을 짓고 평생 수행을 한다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왜 고생을 사서 하는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스님 손을 뿌리치고 냅다 아래로 도망을 쳤다. 가장 걸리는 것은 둘째 오빠 혼자 집안을 살피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까지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다 핑계였다. 세상에 살면서 만지고 보고 듣고 멋있고 이쁜 옷을 입고 혀에 녹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고 싶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잿빛 승복이 나는 부러웠다. 왜 그것이 부러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비구니들을 뒤돌아보면서 어둑해진 산을 내려왔다. 내 앞에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보따리를 들고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엄마한테 잡혀가는 것 같았다. ‘그래 겁나게 잘 생각했소.’ 나는 그들을 앞질러 걸었다. ‘사는 게 별 것 없구나!’ 혼자 중얼거리면서 한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때 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낡은 회색 가사를 입은 눈빛이 맑은 여승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그때 깍지 못한 내 머리카락에게 보내는 송가는 별 의미도 없는 눈물 몇 방울뿐이었다.
그 일 후에도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절의 적막과 숲의 어둠 속에서 불안과 뚜렷하지 않은 내 앞길에 대해 자문자답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내 인생을 끝낼 수는 없어!’ 나는 나를 끝없이 재촉하고 달랬다. 퇴근하는 발길은 반사적으로 불빛에 이끌려 버스를 타고 은행동에 내렸다. 불빛을 따라 돌고 돌다가 홍명상가를 거쳐 중앙시장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순대를 안주 삼아 얼마나 혈기에 취했던가. 다음날 사무실에 출근해 앉아있어도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여기서 직장이나 다니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단지 내 속에서 솟구치는 갈증만이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결론은 언제나 그래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다 건너 저 너머로 가봐야겠다는 갈증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래 가자. 바다를 건너가서 거기 무엇이 있는지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자.
나는 일본으로 가기 위해 오빠 몰래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한국서 온 유학생 술집으로 빠지다’라는 기사가 났다. 여차여차하다가 오빠한테 일본행 계획을 들키게 됐다. 그 순간 일본행은 간단하게 끝나버렸다. 나는 항시 일상에서 탈출하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혼자 집을 건사하는 오빠를 생각하면 나만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흔들리던 20대였다. 나는 밤이면 깜박거리다 사라지는 별이었다.
얼마 전이었다. 노랗게 고개 숙이고 있는 벼를 TV에서 보았다. 벼가 익어가는 논둑길이 그리워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이리저리 흐르는 중 여주 대성사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옛날 일이 떠올랐다.
30대 어느 날이었다. 서울에서 친구랑 길을 걷고 있었다. 식당 문을 열려던 스님이 내게로 걸어왔다. 나를 보며 “단명할 수야”라고 말했다. 전화번호를 주며 절에 오라던 스님이 생각났다. 운전대를 돌려 그 절을 찾아갔다. 암자보다는 큰 절이었다. 물론 그 스님은 계시지 않았다.
‘스님 나 아직 안 죽고 살아있는 것 본께 천재는 아닌가 봐요.’
한때는 내가 천재라는 생각이 들어 요절할 수 있겠다 싶었었다. 나는 천재도 아니고 해외 파도 아니고 스님도 못되고 운동권 흉내만 내 정치인도 못되고. 이제 와 쥐뿔 되지 않은 자판이나 멈출 줄 모르고 두드리고 있다.
내게는 야망도 없다 욕망도 없다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 - 페르난두 페소아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중-
내가 좋아하는 시다. 갖고 있던 것을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끝내 내 앞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나 또한 내 앞에서 곧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하늘을 떠도는 구름과 흰 고무신, 흰 발목과 풀잎에 맺히는 새벽이슬 한 방울도 다 마찬가지다. 다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알 수 없음이다. 내가 죽어 나무가 된다면 그 어디에도 내 이름을 두지 않을 것이다.
혹 절에 가서 하얀 고무신을 내려다보면 동학사 그 가지런한 흰 빛이 떠오른다. 언제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저쪽을 가 볼 수 있을까. 아무래도 동학사를 한번 갔다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