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버스 창에 매달려 달리는 구름 216
유치원 버스 창에 매달려 달리는 구름
‘아차차, 어쩌까’ 속력만 신경 쓰다가 횡단보도 지나고서야 빨간불이라는 것을 알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차들은 횡단보도 뒤에서 정지하고 있다. 머리털이 벗어질 정도로 더워 횡단보도에 사람이 없다. 그래서 생각 없이 핸들을 움직였다.
고향 친구 기석이에게서 점심 먹자고 전화가 왔다. 친구 얼굴을 보려면 이 주일 전에 약속해야 한다. 그의 직장은 팔당대교 근처에 있다.
오늘 운세는 나들이 날인가 보다. 유쾌하고 멋스러운 연분 동생, 문숙 동생도 오랜만에 얼굴 보자고 한다. 글 좀 쓸까 하다 산만해져 종 쳤다. 친구에게로 가기로 정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사무실을 가려면 하남초등학교를 지나 무찔러 가는 길이 있다. 초등학교 앞 속도는 30km, 쇠똥구리보다 느린 속도로 바퀴를 끌었다. ‘속도위반 범칙금 13만 원’ 멈춘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바퀴는 빨간불인데 가고 있었다
사무실까지 3km 정도 남았다. 내 머릿속은 철 수세미로 가득했다. 찌글 빠글이었다. 만화에서 보면 볼펜으로 낙서하듯 선을 엉겨 그려놓은 것 같았다. ‘이 일을 어찌할꼬’ 봄에 범칙금 13만 원 내면서 얼빠진 나와 경찰에게 속으로 오만 욕을 했었다. 그렇게 조심하자고 해놓고. 머리에 지진이 날수밖에 없다.
사무실에 도착해 친구에게 범칙금 이야기를 했다.
“니가 범칙금 내줘야 겄어.”
군더더기를 붙여 설명했다. 친구는 일어나 자기 방을 가서 돈을 가져왔다. 범칙금 내고 남을 돈이었다.
아르바이트해 조카 학원비를 내준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눈물이 나왔다. 울 일도 아닌데.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등에도 흘렀다. 찜질방 같았다. 울지 않으려고 눈 끝에 힘을 주었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고 친구가 범칙금을 줄 줄 알았다. 만약에 안 주면 그것 또한 무슨 쪽팔림인가. 기석이는 친구들이 모이면 찻값 밥값 다 쏜다. 인원이 많고 적음에 개의치 않는다. 살았을 때 베풀자.
곤경에 처한 친구들이 부탁하면 자기 돈 써서라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래서 나도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났을까.
그 편안한 마음이 문제가 됐다. 학원비 말은 왜 하고. 그니까, 아마 내가 쪼들려서 그러니 범칙금 내달라는 속뜻이었을 거다. 팔당대교 넘어서는데 눈물은 쏙 들어가고 너무 민망했다.
요새 받는 것에 익숙해졌을까. 지인들이 모기약, 칫솔, 비누, 반찬, 고기, 과일 한 살림 들고 집에 찾아온다. 냉장고가 늘 만원이다. 그래서 나도 호박, 고추, 가지, 상추라도 따서 보낸다. 절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은데 왜 받은 것만 생각날까. 마음 같아서는 나라도 싸서 보내고 싶지만, 성한 데 없는 나를 누가 받아주겠는가.
그들에게 가닿지 못한 마음을 뭐라도 풀리면 갚겠다는 다짐만 풀잎마다 이슬로 맺힌다.
늦은 밤까지 잠이 오지 않아 냉동실에서 꽁꽁 언 막걸리를 꺼냈다. 막걸리병에서 물방울이 흐른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몸가짐이 있다. 불순물을 걷어 내면서 살아가자고 다짐했었다. 그럼 결심뿐이었던가. 나도 어쩔 수 없이 뻔뻔해졌구나. 세상에 공짜 없다고 그렇게 외치더니만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까지 미쳤다.
나의 마지노선은 뭐였을까. 전기톱에 앞에 떨고 있는 나무, 떠돌이 개, 길고양이 울음, 유치원 버스 창에 매달려 달리는 구름, 누군가를 대신해 울어주는 빗방울, 개울가 돌멩이 부딪히며 돌아가는 물소리처럼 숨어 사는 소리를 들어주는 것이 나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전쟁이나 돈이 아니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에 귀 기울이고, 없을수록 기대고 싶은 싹부터 잘라내며 그렇게 살자고 했었다.
그런데 취하지도 않았는데 너무 멀리 나간 거 아닌가.
비운 잔에 술을 꽉꽉 눌러 채우며 한 잔, 한 잔, 또 한잔을 마시며 지구를 몇 바퀴 돌았다.
취기가 돌자 속력이 아니라 신호위반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다음을 뒤져보니 신호위반 6만 원이다. 물론 6만 원도 큰돈이지만, 그래도 친구에게 범칙금 말 안 꺼 냈을걸, 혼자 사는 방식이니 몸가짐이니 전쟁이니 구원이니 거창하게 생각 안 했을 텐데.
종일 속력을 생각하다 보니 눈앞에 쇠똥구리, 달팽이가 떠오른다.
에이, 한 병 더 마시자. 뚜껑을 또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