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는 96세도 아가씨야 226
시골에서는 96세도 아가씨야
춥다. 영하로 넘어간다는 저녁 뉴스가 흘러나온다. 시골 일은 끝이 없지만, 땅콩은 다 캤을까.
얼마 전 땅콩 캐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누구는 전답 팔고 집 팔아 기를 쓰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폭탄주 좋아하고 시만 쓰던 숙인 언니, 여의도를 떠났다.
그녀는 교직에만 있었던 남편과 시엄니를 모시고 부모가 물려준 땅을 일구며 시골에서 살고 있다.
나는 지인과 남한산성 아래 고골에서 승용차로 출발했다. 음성에서 한참 더 들어갔다. 밭 한 군데 집 한 채 솟아있었다. 언니와 시엄니는 엉덩이에 앉은뱅이 의자를 달고 앉아 땅콩을 캐고 있었다.
나는 모자 쓰고 장화로 갈아 신었다. 요즈음은 해가 일찍 져, 내 손을 재촉하며 땅콩 줄기를 뽑았다. 땅콩은 흙 밖으로 몇 개 올라오고 땅속에 더 많이 묻혀있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와 굳어 그렇다고 했다. 호미로 일일이 흙을 뒤집으면 땅콩이 하얗게 드러났다. 햇빛을 받자 눈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자 재미있었다. 넓고 깊게 팠다.
언니 남편은 간간이 사라졌다. 언니는 부르지도 찾지도 않았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그래도 다 못하면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여유를 부렸다. 나는 힘들게 농사지은 것 그럴 수 없다고 재촉했다.
플라스틱 박스 안에 모은 땅콩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수돗가에서 물로 씻어 햇빛에 말렸다.
이 고생을 보면서 나는 앞으로 땅콩은 절대 깎지 않고 사기로 했다.
-언니, 팔다리 빠지겄네, 내년에는 농사 반만 지어.
-땅 놀리면 벌금 물려야.
그래도 그녀는 몸은 힘들지만, 고향이 좋다고 했다. 서울에서 살 때는 잠이 안 오면 티브이를 보든가 핸드폰 들여다봤다고. 지금은 숟가락 놓자마자 잠이 온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종일 아파트에서 앉아있던 시어머니가 다행히 시골 생활을 좋아한다고 했다. 새벽부터 밭에 나가 저녁에 들어온다고.
밭둑에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마을에 청년회장 70세, 돌아다니는 것은 네발 달린 강이지 와 고양이들과 빈집뿐,
이사 오면 집은 무상, 애를 낳으면 대학까지 학자금 제공. 귀촌하면 영농자금 지원한다고 한다.
나는 섬 출신이지만 남한산성 산 밑으로 이사 오기 전 까지 도시에서 전전했다. 무엇이 그리 아쉬운지 지금도 서울 옆구리에서 살고 있다. 중앙은 입과 눈이 즐거운 것이 정말 많다. 시골 가면 너무 싱겁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싱거움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획장시켜준다. 도시에서는 얼굴도 없는 것 한테 쫓겨 앞만 보고 갔다.
땅콩 이야기하다 말이 샛길로 새 버렸다.
나는 점심도 먹지 않고 땅콩 대에서 콩을 따고 있는 할머니를 보고 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가 종일 일 만하네.
-시골에는 96세도 아가씨야.
옆에서 듣고 있던 시 엄니 이 다 빠진 입으로 땅콩처럼 하얗게 웃고 있다.
해가 졌다. 저녁밥을 먹고 출발하려 차로 갔다. 차 옆에 96세 아가씨가 직접 밭에서 따고 캔 가지, 고추, 대파가 검정비닐봉지 안에 담아있었다. 고구마, 복숭아, 땅콩이 차 안에 가득했다.
어둔 마당에 여자 둘이 손을 흔들며 서 있다.
해가 더 짧아지기 전에 땅콩 같은 아가씨도 보고 언니랑 폭탄주 한 잔 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