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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레나 Mar 10. 2022

멀리 있어서 더 뭉클한 '가족'이라는 단어

이민생활 7년 차, 가까운 듯 먼 한국


유학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가 부모님 생각을 하면 마음부터 올라오는 뭉클함이 있다.


한국에서 옆에 있었다면 오늘 누가 나를 괴롭혔으며 이러한 일이 있어서 속상했다고 투정을 부렸겠지만 내 옆에서 도와줄 수 없는 공간에 떨어져 있다 보니 나보다 내 이야기를 듣고 속상해할 가족들이 생각나서 항상 참아오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13살 초등학교 때 영국으로 한 달 정도 어학연수를 간 적이 있는데 그때에는 인종차별도 당했었고 같은 한국인 사이에서도 중학교 고등학교 언니 오빠들도 많이 있어서 그 사이에서도 왕따를 당한 적이 있다. 내가 낄 자리는 항상 없었고 주말마다 나가기 위해 타는 버스에서도 맨 뒷자리는 항상 내 자리였고 그 도시에서도 13살 어린아이에게는 위험할 수 있었겠지만 눈치 보기가 싫어 혼자 다녔다. 사진들도 보면 일본 친구가 같이 찍어주거나 선생님이 찍어주는 게 다반사였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 보면 한 번씩 그 어린 나이에도 서러움과 속상한 감정들이 욱하고 올라올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항상 학교 중앙에 있는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갔다. 한 손에는 국제전화 카드를 쥐고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르려고 하다가 잠시 수화기를 내려놓고 마음을 다독일 시간을 가졌다. 내가 이렇게 울고불고 있으면 당장 와줄 수 없는 부모님이 속상해할까 봐 다 울고 진정이 되면 그때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생이었는데 어떻게 그러한 생각을 했을까 하고 놀랍기도 하다.


그때의 그 행동이 지금까지도 나의 버릇 중 하나로 남아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도 학교 수업과 학교 시험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잠을 3시간밖에 못 자는 날도 있었지만 한 번도 힘들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가끔은 수화기로 부모님이 “딸, 힘들지?” 하고 물어보면 나는 무조건 “아니, 괜찮아!”였다. 나는 정말 부모님은 역시 다르구나를 느꼈던 점은 이렇게 아니라고 하는데도 부모님은 다 알고 계셨던 것이다. 어느 날은 힘든 점이 있으면 엄마, 나 힘들어 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속상했고 진짜 못하겠어라든지 말해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왜 참고만 있냐고 자식들의 투정을 부려고 가끔을 들어주고 하는 게 부모인데 어떨 때는 속상하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내 머리에 띵하고 한 대 맞은 것처럼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너무 숨겼던 그 마음이 오히려 혼자만 해결하려고 했던 행동이 오히려 속상하게 했다고 하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다시 미국에 온 이후로는 나도 하나씩 바꾸려고 노력을 했다. 부모님과 전화도 자주 하고 오늘 하루도 이야기해 주고 내 감정들을 조금씩 표현했다. 나는 어머니랑 통화를 가장 자주 하는데 그렇게 내 태도도 바꾸려고 하니 어머니도 내가 서운할까 봐 말을 못 했던 이야기들도 해주는데 오히려 서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그때 왜 항상 꽁꽁 혼자 숨기고 그렇게 혼자 해결하려고 했을까. 말을 해줘도 항상 다 힘들게 해결하고 나서 이야기를 해주고 그랬을까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담아왔던 버릇이었지만 이제는 나 역시 고치려고 노력을 하니 가족들이 더 애틋하고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 같다. 힘들 때도 함께하고 좋을 때도 함께하는 게 가족 아니라던가. 누구든지 가족이라는 소중함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항상 옆에 붙어있기 때문에 더 잘해야지! 더 놀러도 같이 가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야지! 하면서도 막상 실천에 옮기기는 때로는 힘이 들다. 정작 본인 역시 평일엔 야근을 하며 주말에도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이것만 끝내고 해야지 하면서 하나씩 미뤄지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와의 이별


나는 유학 생활 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항상 시골에 가면 나를 따뜻하게 그저 사랑으로 보담아 주신 분이며 내가 마음이 힘이 들 때에는 오히려 어머니께 시골에 가자고 먼저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막내딸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셨는데 결혼해서 서울로 자리를 잡으면서 명절 때에만 볼 수 있는 애틋한 부모님이 되었다. 추석이나 설날 때면 나는 친할머니를 뵙고 점심을 먹은 후 시골로 출발을 했는데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으시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할아버지는 마당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하염없이 몇 시간을 기다리셨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고 어두워지고 이제 마당에 주차를 하려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치면 항상 할아버지께서는 그제야 일어나셔서 웃으며 맞이해주셨다. 왜 추운데 나와있었냐고 말을 하면 항상 돌아오는 답변은 지금 나온 거라고 이야기를 하셨지만 할아버지 손을 꼭 잡으면 얼음장 같은 손에 나는 그 말이 거짓말임을 어린 나이에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멀리서 전화하면 항상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셨고 어머니께서도 나와 동생을 대학까지 보내고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많이 못 찾아가고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서 내가 대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 그때에는 안심하고 시골로 자주 가서 시간을 보내고 오시겠다고 항상 나와 동생에게 이야기를 하셨다.


2012년 겨울, 나는 친한 동생으로부터 메신저로 ‘누나 괜찮아?’라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항상 이야기도 안 하시고 혼자 해결하는 가족들을 알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보다 먼저 삼촌에게 전화를 하였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는 통곡소리와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리로 나는 갑자기 안 좋은 직감이 왔다.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마음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하였으며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역시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를 않는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자리에서 나는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제 편입하고 졸업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왜 그렇게 바쁘게 갔는지, 졸업하고 한국 가서 더 잘해드리고 호강시켜드린다고 했는데 이렇게 속으로 한참을 원망하고 슬퍼있다가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어머니도 나와 같은 생각이셨다. 나와 동생을 대학 졸업시키고 이제 더 잘해드리려고 했는데 그렇게 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마음과 늦은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계셨다. 그래서 나는 그날 깨달았다. 내가 준비된 다음에 미루기만 하고 그때 더 잘해드린다고 약속을 해도 그때에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걸.


대학교를 드디어 졸업하고 나는 바로 한국에 왔다. 나의 목표는 일 년에 무조건 가족여행은 2번 이상은 가는 거였다. 한 번은 해외로 또 다른 한 번은 국내로 가기로 세웠지만 가족들과 함께라면 국내든 해외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은 가족과 보냈다. 근교로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어머니 아버지와 동생과 남양주든 팔당이든 카페 투어를 다녔다. 계획을 세워서 다닌 여행이었지만 나는 그 시간만큼은 너무 좋았다.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가 해외에 오래 계셔서 많이 시간도 못 보냈는데 커서는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서로 오래 떨어져 있어 그 시간만큼은 너무 소중하고 값진 시간이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 아버지도 친구처럼 장난도 치기도 하고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고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해서 나와 동생은 오히려 가족끼리 여행 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여름에는 설악산으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그 후 가을에는 중국 상해로 여행사를 끼지 않고 다니기도 하였으며 그다음 해에는 사이판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우리 여행의 한 가지 항상 지켜온 사항은 절대 여행사를 끼지 않는다는 것.


 아침에 수영하고 싶으면 수영도 하고 바다를 보고 싶으면 바다도 보고 이렇게 여유롭게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해서 스케줄이 정해져 있는 여행사를 통하여 가지 않았다. 이렇게 여행을 다니고 주말마다 근교 카페를 다니며 더욱 이야기를 할 시간이 많아졌고 매일같이 보고 당연하게 생각이 들어도 소중함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나의 가장 큰 힘과 내 편은 가족이다. 가끔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심통을 부리기도 하고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가 무슨 일을 했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도 그런 나를 사랑해 주고 품어주는 건 가족일 것이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지금 바쁘고 시간이 없다고 해도 조그마한 것부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더 많이 하기를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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