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첫째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전하는 이야기.
네가 우리에게 와서 누구나 그렇듯 처음으로 부모가 되었다. 부모가 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도전이었다. 의미나 개념상 부모가 아닌 실질적 부모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혼 전에 부모님으로부터 너도 부모가 되어보면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 알 것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실감 나지 않았다. 1992년 겨울 네가 태어나고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울면 불안하고 웃으면 행복해지는 우리는 나약한 존재였다.
주말 부부인 우리를 대신해서 순천 인제동 할머니가 키우고 있었기에 걷고 나서도 한참 동안 할머니가 너의 엄마였다. 걷고 뛰고 하면서 시간이 흘러 어느덧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순으로 입학했다. 피아노 학원 외에는 특별히 배우는 게 없어서 너는 집에서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었다. 가끔 자전거를 타기도 했으나 놀이터보다 책장 앞에 앉아서 책을 읽는 일에 집중했다.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수학에 관심이 많다고 남들처럼 여기저기 경시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기도 했다. 부모의 욕심 탓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질없는 일이었다. 한편으론 그렇게라도 했기에 여기까지 왔을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때는 시험 기간임에도 교과서로 공부하지 않고 몰래 빌려온 책을 읽어서 집안 분위기가 한랭전선인 적이 많았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에 동생과 나는 더 추운 겨울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며칠 지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갔지만, 시험 이후 일주일은 3년 내내 카세트테이프처럼 반복 재생되었다. 나는 네가 다른 집 아이들보다 압박 없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답을 주기 바란다.)
네가 가장 힘든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순천에서 남녀공학 중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이 없는 광양지역 남자 고등학교로 진학해서 적응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졸업 후에도 만나는 평생 친구 두 명이 있어서 좋다. 구성원 대부분이 같은 중학교 출신이어서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첫 모의고사에서 전국 상위 1%에 해당하는 결과를 받아서 놀랐다. 5월 중간고사 결과를 듣고는 믿기지 않아 성적표를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수긍을 미룬 적도 있었다. 3년 내내 같은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스트레스받는 일인지 알기에 잘 극복해 줘서 고마웠다. 대학입시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차선을 택한 것은 전화위복이었다. 결국엔 졸업과 동시에 네가 원했던 개업 약사로 즐겁게 일하고 결혼까지 했으니 행복하게 사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조금은 쑥스럽지만, 이 말은 꼭 전하고 싶다. “나는 네가 33년 전 다른 집이 아닌 우리의 아들로 태어나 잘 자라주어 고맙다. 너도 우리도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한순간도 자랑스럽지 않게 여긴 적은 없었다. 이제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으니 둘이서, 그리고 언젠가는 셋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너는 기억에 없을지 몰라도 나는 또렷이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네가 다섯 살 무렵, 둘이서 버스를 타고 지리산 노고단에 갔던 일이다. 사진첩을 보면 그때의 모습이 남아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네가 대학 기숙사에 입소하던 날이다. 헤어지며 나를 안아주었지. 성인이 된 아들의 포옹이 나를 울컥하게 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위기는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 전 오토바이 사고였을 것이다. 전신 또는 하반신 마비라는 위험을 피해서 다행이었다. 척추 두 곳이 골절되어 병원에 두 달을 입원했다. 운 좋게 넘겼지만 지금도 후유증이 남지 않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너와 나 사이에 소득이 있었다. 연구년(안식년) 중이었던 나는 곁에서 너를 돌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로 아침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서 부족했던 돌봄을 보충할 수 있었고, 너의 마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너를 여섯 해 동안 키워주신 인제동 할머니, 할아버지를 잊으면 안 된다. 순천 가까이 가는 일이 있으면 시간을 내어 성묘하기를 바란다.
늘 네 곁에 서 있는,
든든한 첫째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