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큰형은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칠 남매 맏이의 무게

by 할슈타트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근 40년 만에 형님께 편지를 씁니다. 오늘 이 말을 꺼내지 않으면, 아마도 평생 전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미루는 동안 마음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말이 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습니다.


형님과 저는 스무 살의 시간 차이를 두고 태어난 형제입니다. 함께 길을 걸으면 사람들은 종종 부자지간으로 착각했습니다.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누군가의 아버지로 보일 만큼 형님은 늘 제 앞에 서 계셨고, 저는 그 뒤를 따라 걷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형님, 알고 계십니까. 제가 교사가 된 뒤 연수나 강연 자리에서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곤 했습니다. 첫 번째는 큰형님, 두 번째는 부모님이라고요. 남들은 역사 속 위인이나 유명인을 떠올렸지만, 제게 존경은 늘 살아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대답은 변함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까지 우리 가족은 여덟 남매였습니다. 어린 저는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했지만, 큰누나를 먼저 떠나보내고 우리는 일곱 남매가 되었습니다. 여섯째였던 저는, 맏이로서 감당해야 했을 형님의 무게를 어렴풋이 보며 자랐습니다. 그저 고맙다는 마음만은 또렷했습니다. 형님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제 삶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70년대 말, 민주화운동의 여파로 형님이 잠시 우리 곁을 떠나 영어의 몸이 되었을 때, 청주에서 보내온 엽서 한 장은 제게 공부를 놓지 않게 한 힘이었습니다.


가난했던 우리 남매는 모두 형님 집을 거쳐 갔습니다.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구하던 시절, 형님 집은 언제나 지렛대이자 안식처였습니다. 저는 한 달 남짓 머물렀지만, 여섯 남매가 부산의 그 집에서 함께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을 가능하게 한 사람은 형님이었습니다.


형님은 기억하지 못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늘 제가 형님의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형님은 가장 힘들던 시절, 제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며 충분히 지원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정반대입니다. 조카 둘과 형수님을 책임지며, 부모님과 동생들까지 돌보아야 했던 형님의 삶을 떠올리면, 그 자체로 이미 넘치도록 충분했습니다. 형님은 제게 어떤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이었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형님은 떳떳하셔도 됩니다.


오늘은 마음속에 오래 묻어두었던 이야기 하나를 꺼내려합니다. 1982년, 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6월쯤, 하숙비를 받으러 수업을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형님 집 앞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서성이다 결국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길가에 세워진 트럭 아래 긴 의자를 놓고 밤을 보냈습니다. 잠은 오지 않았고, 새벽이 오자마자 다시 마산으로 돌아가 등교했습니다. 형님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야, 가난한 부모를 대신해 동생들을 떠안았던 형님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어,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요즘 세상에 동생 하나 책임지기도 어려운데, 누가 여섯 남매를 감당하겠습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합격했을 때, 학비 걱정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다행히 부산대학에 합격했지만, 그마저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휴학한 채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1년 후 다른 지방 국립 사범대학에 진학해 교사가 되었고, 그 선택은 제 삶을 안정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이후 33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서 웃고 울며 살았습니다.


교직 생활 33년, 6년 6개월을 남기고 저는 미련 없이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큰 탈 없이 스스로 물러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고마웠습니다. 명퇴 3년 차가 된 지금, 내년이면 형님은 팔순을 맞이하시고 저는 환갑이 됩니다. 두 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직업을 갖고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저는 부족하지 않은 연금으로 생활하며, 평생학습관에서 새로운 동료들과 봉사 활동을 하고, 시니어를 대상으로 그림책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시간입니다.


형님, 이 모든 시간의 바탕에는 형님의 지지와 지원이 있었습니다. 제가 드린 것은 거의 없는데, 받은 것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형님이 여섯 남매를 품을 수 있었던 데에는 형수님의 배려가 더 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간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 편지를 빌려 형수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늦었지만 민주화운동의 옥고를 인정받아 국가유공자가 되신 것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올해는 형님의 팔순과 저의 환갑을 맞아, 가족 여행을 함께 떠나고 싶습니다.


형님, 오랜 세월 장남으로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는 책임과 부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서운함을 조금씩 내려놓으시고, 편안한 날들만 이어지길 바랍니다. 형님의 동생으로 태어나 여기까지 살아온 것이 제 인생의 큰 행운이었습니다. 늘 죄송하고, 늘 감사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다시 뵙는 그날까지 평안하십시오.


형님을 언제나 존경하는
동생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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