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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을 하면 되려던 일도 안 된다

14화 - 내버려 둬

by 물오름달
후회만 느는 인생이 어떻게 내 거가 돼


언제나처럼 침대에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올랐다. 간이 싱거운 병원밥을 먹으면서 통 입맛이 없다가 처음으로 생각난 음식이 바로 그거였다.


수술을 하기 전 가족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자주 갔던 쇼핑몰에는 푸드트럭 형식으로 된 식당이 있었는데, 그중 한 군데에서 기가 막힌 맛의 '큐브 스테이크'를 팔았었다. 육즙 가득한 고기에 달콤한 스테이크 소스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맛을 자랑했고, 같이 나오는 감자 샐러드와 채소 볶음도 구미를 당겼다.

아무리 사람이 분비고 자리가 없어도 어떻게든 기다려 사 먹을 정도로 맛있었다. 물론 그 당시 가격으로 말도 안 되게 비쌌지만 먹지 않으면 후회할 정도였으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내 요청을 듣고 동생과 아빠는 저녁에 바로 스테이크를 포장해 왔다. 테이크 아웃 전문점이 아니라서 이렇다 할 포장 용기도 없었다. 그냥 남는 접시로 아무렇게나 덮어서 품에 안고 택시를 탄 것이다.

정성으로 들고 왔지만 다 식어버린 스테이크를 미안한 눈빛으로 건네던 동생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얼굴 뒤 묘한 불안이 섞여있었기에 더 속상했다.


학창 시절, 뭐든 척척 해내는 동생은 아픈 언니보다 손이 덜 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중학교 수학까지 다 뗄 만큼 똑똑했기에 거는 기대도 컸다. 전폭적인 지원 없이도 스스로에게 한계를 두지 않고 성실하게 노력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인 시간들은 동생을 더 빛나게 해 줬다. 나이는 어렸지만 본받을만한 면이 충분한 아이였다. 그런 동생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고 늘 학교 아니면 학원에서만 머물렀다.

그에 반해 나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된 때부터 부모님이랑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느라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렇게 혼자서만 추억을 쌓고 다닌 게 후회가 된다.


소중한 시간을 더 재밌게 보내게 해 줄걸.

한 번뿐인 10대 시절을 웃음으로만 가득 채워줄걸.

하는 후회가 발목을 잡는다.




우리 가족은 각자의 전쟁을 해내고 있었다. 한 데 모여 있지 못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을, 그냥 묵묵히 지고 있었을 뿐이다.

침대를 약간 세우고 창 밖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보며 스테이크를 한 점 집었다. 고루 익은 고기가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온기처럼 느껴져 따뜻했다. 다 식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치 언제든 다시 불을 지필 수 있게 데워진 숯이 고기 형상을 띄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걸 먹으면 모두의 염원이 이뤄질 거라고. 언제 아팠냐는 듯 벌떡 일어나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입에 넣고 씹는데 그때와 같이 맛있었다. 잘 먹는 내 모습을 본 엄마도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고기가 질겼다. 꼭꼭 씹어도 모양이 그대로라 그냥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두세 점 밖에 못 먹었는데 더는 먹히지 않았다. 열심히 들고 와준 아빠와 동생에게 미안했지만 그대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마지막까지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누웠는데 10분도 안 돼서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공포심이 밀려올 때, 엄마한테 전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급체인 것 같다고 알렸다. 죽이나 겨우 삼키던 내게 고기는 무리였다. 대체 어떤 자신감으로 고기를 씹었는지 모르겠다. 몇 점 못 먹은 것도 아쉬운데 그 뒤에 신랄한 고통까지 견뎌야 하다니 억울했다.

다행히 지금 있는 곳은 병원이었다. 물론, 급체가 왔다고 해서 당장 약을 쓴다거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도움이 됐다. 간호사 선생님을 부르자 봉지를 가지고 오셨다. 일단 게워내야 한다. 욱 하는 쏠림에 나도 모르게 몸이 침대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몸 뒤집기도 못 하던 내가 허리를 비틀어 침대 밖까지 얼굴을 빼냈다. 급한 상황이 닥치면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하나 보다.


생각보다 오바이트 양이 많았다. 놀라울 정도였다. 봉지로는 감당이 안 돼서 덮고 있는 이불을 포대기 삼아 있는 거 없는 거 다 쏟아냈다. 두꺼운 겨울 이불이 한 보따리 꽉 차서 무겁게 늘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은 계속 괜찮다며 달래주셨다. 천천히 이성이 돌아오면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병원에서 겪을 수 있는 창피한 일은 다 당하는 것 같았다. 속이 편해지니 다른 증상들도 같이 가라앉았다. 소식을 듣고 아빠랑 동생은 정말 안타까워했다. 먹고 싶다고 해서 힘들게 가져갔는데 그마저도 먹다가 체해버렸으니 속상할만하다.

넋을 잃었다. 살이 쭉쭉 빠진 데엔 이날의 일이 크게 한 몫 한 것 같다.


병원에 맛집이 많았다. 유명한 빵집도 들어와 있고, 프레첼 같이 맛있는 간식도 곳곳에서 팔았다. 그런데 먹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사 오면 한 입 정도 맛보는 게 전부였다. 나중에 휠체어를 탈 수 있게 되면서는 이곳저곳 구경을 다녔지만 그전까지는 많은 시간을 침대 위에서만 보냈다. 몸이 점차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볼일을 못 본 환자들에겐 관장을 제안한다. 말이 제안이지 사실은 꼭 해야 하는 거다. 나는 관장 때문에 정말 힘들었다. 사춘기 소녀일 때, 가족은 물론이고 선생님까지 보는 앞에서 엉덩이에 플라스틱 대야 같은 걸 끼워 넣고 볼일을 봐야 헸기 때문이다.

약을 넣을 때부터 이상한 느낌이 든다. 몸을 옆으로 돌려 엉덩이에 호스를 연결해 직접적으로 약을 넣어야 하는데, 차가운 온도의 약이 들어오는 게 느껴질 때면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린다.


약을 넣고 2분 정도 지나면 바로 배가 아프다. 보통 사람 같은 경우엔 그 시간을 돌아다니면서 참을 수 있고, 못 참겠을 단계가 되면 화장실에 들어가면 되지만 나는 그 모든 걸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해야 하니 수치심이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소변줄을 왜 차는데. 물리적으로 해결이 안 돼서가 아니라 화장실을 갈 수 없어서 그런 거다. 한 번도 엄한 곳에 볼일을 봐 본 적이 없으니까. 아기 때가 아니고서야.


한 달 까까이 볼일을 못 봐서 밑으로는 찢어질 것 같은 통증과 위로는 태풍이 치는 듯한 느낌에 고통스러워서 소리를 질렀다. 누워서 겪으려니 정말 많이 아팠다. 온 신경이 배에만 집중되어 뭘 할 수가 없었다. 침대 가드를 두 손으로 꽉 잡고 출산을 하듯 기가 막힌 처절함을 경험했다.


그 당시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두 발로 걸어서 화장실만 갈 수 있어도 행복한 거라고. 그 정도면 살아갈 이유가 충분한 것 같다고.


그 경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3번, 4번 반복됐다. 어느 날엔가 MRI를 찍고 돌아오면서 1층에서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얇디얇은 커튼을 쳐 주긴 했지만 어쨌든 사람들 시선이 닿는 한복판에서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정말 힘들었지만 그래도 적응하는 게 사람이라고, 나중에는 괜찮아졌다. 인간의 존엄성을 잊으려고 노력했었던 것 같다. 마음을 내려놓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땐 선택의 자유고 뭐고 없었으니까.


2인실, 옆 배드를 쓰던 유치원생 남자아이는 장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음식이 제대로 소화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 아이는 평생 동안 하루에 한 번씩 관장을 해야 했다. 참 잘 웃고 밝던 아이였는데, 어린 나이부터 대학병원을 다니며 고생하는 게 안쓰럽게 느꺄졌다.

사실 하소연을 하고 있으면서도 양심에 찔리는 게, 나는 그곳에서 아픈 축에도 못 들었었다. 정말 다양한 환자들을 봤다. 머리에 붕대를 하고 휠체어를 타는 사람, 항암을 하러 다니는 사람, 다리 한쪽이 없어 목발을 짚는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수술대에 긴 시간 오르는 아이들까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닥친 문제가 제일 커 보인다. 나의 아픔이 제일로 세 보인다.


건강이 제일 큰 축복인 것 같다.

알고 있지만, 가족들 중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게 기징 통탄스럽다. 마음으로는 백번도 더 고치겠는데, 차라리 내가 아프게 해달라고 빌고 싶은데, 현실은 그게 안 되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손 놓고 지켜봐야 할 수밖에 없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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