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orenda
기억은 희뿌옇고 마음은 선명해서 추억은 그리움이 된다
두 다리가 자유롭지 못했을 때보다 요즘이 더 불안하다. '오늘 하루도 잘 넘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눈을 뜨자마자 떠오른다. 스트레스를 받는 만큼 몸도 이곳저곳 아프다.
겪어보니 불안은, 마음의 나쁜 습관 같은 거다. 젓가락질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 똑바로 밥을 먹으라고 잔소리해도 고치기 쉽지 않은 것처럼, 불안한 마음도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조금씩 새어 나온다. 잘해보자던 다짐도 결국 갉아 먹힌다. 이러나저러나 똑같은 하루가 흘러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등바등 사는 모습에 싫증이 난다.
오늘은 어린이날.
아마도 생일 다음으로 좋아했던 것 같다. 단순히 선물을 받아서 좋은 게 아니라, 부모님이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마음 써주는 것이 좋았다. 그 마음이 소중해서 꼭 사랑을 배우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땐 세상이 필터를 끼운 것처럼 아름답게 빛나 보인다는 영상을 본 적 있다. 정말 공감이 많이 됐다.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 오후에 하교하면서 본 푸른 하늘, 놀고 있으면 인사하러 다가오던 따뜻한 노을, 숙제하다 거실로 나왔을 때 느껴지는 갓 지은 밥의 푸근한 냄새, 좋아하는 친구들이 전부이던 어린 마음까지. 이미 색이 바래진 것들이지만 펼쳐보면 수채화 같이 예쁘게 행복이 덧칠해져 있다. 사소한 것 하나로도 세상이 떠나갈 듯 해맑게 웃을 수 있어서,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게 즐거워서, 환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고 '어린' '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수채화의 물맛(맑고 투명한 느낌)이 잘 살아나 있는 작품 속에서 우리는 모두 한 번쯤 살아봤다. '오늘 점심 뭐 먹지?'가 최고의 고민이던 그때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필터가 빠졌기 때문이다. 돈 때문에, 꿈 때문에, 상처 때문에 더 이상 긍정적일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어떻게 전해도 상처가 될 게 뻔하기에. 입만 달싹이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기 마련이다. 내가 아팠을 때 주위 사람들도 그랬을까. 처연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을까.
들녘에서 아무렇게나 자리를 펴고 누워있는 꿈을 꿨다. 꿈 속인데도 감각이 예민했다. 바람소리가 더 잘 들렸다. 눈앞에서 너울대는 희뿌연 수증기가 더 잘 보였다. 그냥 뻥 뚫린 곳에 멍하니 시선만 두고 있는데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사는 맛인 것 같았다. 고장 난 몸속에 생각이 갇힌 듯한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깨고 싶지 않았던 달콤한 꿈이었다.
'으아아악!!!'
잠깐 곯아떨어졌던 모양이다. 일어나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자다가 깨면 훨씬 아팠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엔 소리를 내지 않고 참을 수 있지만,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통증이 느껴지면 그대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관장을 여러 번 했는데도 큰 변이 계속 내려와 살을 찢어댔다. 계속 화장실을 갈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수액처럼 맞는 마약성 진통제, 사탕처럼 빠는 마약성 진통제, 알약처럼 삼키는 마약성 진통제. 고루 바꿔가며 처방을 받았다. 여자들 생리할 때 변이 마려워 배가 심하게 아픈 것처럼 비슷한 통증이 몇 배로 부풀어 느껴졌다. 이게 이렇게까지 아플 일인가 창피해 고개를 들 수도 없지만, 그땐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아파하는 나를 보고, 아빠는 울었다. 엄마 아빠가 하루 보호자 교대를 한 날이었다. 밝은 표정으로 와서 아플 땐 손을 잡아주고 내내 웃어 보이며 옆에서 같이 잠을 자더니, 돌아가는 길에 아기처럼 엉엉 울어버렸단다. 우리 가족은 왜 이리 늘 불쌍한가 하는 원망 때문에 삶이 무너질 듯했더란다.
아빠가 우는 모습은 살면서 본 적이 없다. 눈가가 촉촉했던 적은 있어도 우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만큼 안 좋은 감정은 최대한 우리에게 숨기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엄마 아빠가 누구와 비교해도 존경스러울 정도로 좋은 부모님이라서 나이가 들수록 어깨가 무거워진다.
'우리 엄마 아빠는 이렇게 늙으면 안 되는데.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행복해야 하는데. 꼭 그렇게 만들어줘야 하는데.' 하는 생각들이 끊이지 않는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효도라는 걸 제대로 해 볼 수나 있을까?
세상은 정말이지 조금도 공평하지 않다는 걸 일찍이 깨우쳤다. 태어나길 바라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고, 환경을 고를 수도 없다. 이유 없이 아프게 태어난 사람도 있고, 이유 없이 잘난 집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다. 모든 건 자기 하기 나름이라지만 이렇게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나.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막상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숨소리 하나도 신경에 거슬리게 될 것이다. 세상은 동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비관적으로 행동하라는 뜻은 아니다. 혹시, 지금 상황이 너무도 고달프다면 잘하고 있다는 거다. 당신의 최선은 이미 보통의 기준을 한참 앞섰다. 누구라도 당신만큼 버텨내진 못했을 것이다. 후회도, 자책도 히지 말고, 이젠 자기 자신을 조금 더 편안하게 해 주자. 다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넓은 등을 있는 힘껏 토닥여주자.
깁스를 풀러 가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난 아직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데 다리는 자유를 찾아간다. 수술 한 직후부터 여태 아픈 감각밖에는 느껴보지 못했다. 대형 화물차가 무릎 위를 짓밟고 달아난 것처럼 묵직하고, 무섭고, 아팠다.
드릴 소리가 나는 전동칼로 석고 사이를 갈랐다. 처음엔 무서웠는데 오히려 다리에 감각이 없으니 괜찮았다. 실수로 다리에 상처를 낸다 해도 모를 것 같았다. 붕대가 찢기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처음으로 보는 내 다리였다.
무릎 양쪽 사이드에 검지 손가락만 한 흉터가 두 개씩, 총 네 개가 생겼다. 반바지를 입으면 너무도 눈에 잘 띌 것 같은 모양새였다. 여자라서 더 신경 쓰일 만 하지만 난 괜찮았다. 보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어쨌든 이 시간을 잘 견뎌냈다는 증표이기도 하니까.
피딱지가 굳어있는 듯했고, 실밥을 풀기 전이라 봉합 자국이 선명했다. 털은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고 다리는 얄팍해졌다. 한눈에 봐도 살과 근육이 다 빠진 듯했다.
그래, 근육.
재활할 때 가장 중요한 게 근육이다. 수술하기 전 병원에서 알려줬던 운동을 더 열심히 했다면 회복이 빨랐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누워있었다 보니 일상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근육조차 사라져 버렸다. 다시 걷기 위해 힘을 길러야 했고, 그 과정은 눈물이 날 만큼 혹독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인공인대를 삽입했기 때문에 무릎 관절이 꺾이지 않았다. 이걸 내 것처럼 사용하기 위해선 무릎 각도를 서서히 굽혀나가야 했다.
폐색전증 때문에 먹은 헤파린이라는 약은 피의 응고를 방해하는 성분이 있다. 그 말은 피를 묽게 만든다는 것이다. 의사는 내게 이렇게 경고했다.
"약을 먹는 중에는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피가 한 번 나면 멈추지 않을 수 있어요. 작은 상처라도 지혈이 안 되면 위험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그 말은 항상 덤벙거리는 내게 적당한 긴장감을 주었다. 하물며 종이에 베이는 것까지 조심하라는데 겁이 안 날 수가 있나. 최대한 피가 날 일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뭐, 나는 침대 밖을 나갈 수 없는데 다칠 일이야 있겠어.'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된 데에도 다 이유가 있다.
먼저 무릎 각도를 좁히는 것부터 해야 했다. 노란색으로 된 재활기계를 빌렸다. 내 기억엔 이것조차도 다 돈이었다. 작은 미끄럼틀처럼 생긴 기계에 다리를 올리고 벨트로 고정하면 설정한 각도만큼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였다. 무릎을 자동으로 세웠다가 다시 펴주는 것이다. 나는 그걸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꾸준히 사용해야 했다.
지금 글을 쓰는 와중에도 그때를 회상하니 무릎이 뻐근하다. 무릎을 강제로 굽히는 건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꽉 쥔 주먹이 땀으로 흥건해질 만큼 아팠다. 솔직히 엉덩이를 살짝 들어 아프기 직전까지만 움직이도록 꼼수를 부리고 싶었지만 어차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꽉 물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말이 없었다면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겠다.
병원에서 권장한 각도만큼 드디어 다 구부려졌다. 최소 일주일은 넘게 걸린 것 같다. 하고 나면 하루 종일 뻐근하고 아파서 여운이 오래갔다. 하루에 1~2시간씩만 진행했는데도 24시간 그 기계와 함께 한 기분이었다. 한동안은 노란색으로 된 모든 것들을 싫어했다. 너무 아파서 꼴도 보기 싫었다. 몸에 좋은 바나나는 껍질을 다 벗기고 속살만 잘라먹었다. 평소 좋아했던 만년필에도 노란색이 들어 있어 서랍에 숨겨 버렸다. 그 정도였다. 재활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다.
더위가 한소끔 가라앉은 어느 날 드디어 처음으로 두 발을 땅에 디뎌보는 순간이 왔다. 침대에서 완전히 등을 떼고 걸터앉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중력이 이렇게 무거웠구나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서서 걷는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좋은 마음보다는 확신이 서지 않아 불안했다. 그 불안함은 괜한 기우였을까.
아, 어떻게 걷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