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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건

16화 - 떨지 않을 용기

by 물오름달
방긋 웃으며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부축을 받아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맨발이 차가운 바닥에 닿는 순간, 기울었던 세상이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한 발 떼기가 무섭고 머리가 울릴 정도로 어지러웠지만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처음엔 딱 다섯 발자국만 걸어 보았다.

여전히 다리는 통나무처럼 딱딱하고 감당하기에 큰 통증이 있었지만 욕심이 났다. 병실 밖으로 딱 한 발자국만 나가보고 싶다는 욕심.


엄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자신의 20대가 생각났다고 한다. 멋모르고 시작한 결혼생활이었지만 힘들어도 내가 있어 포기할 수 없었다. 첫걸음마를 지켜보던 그때, 불안하면서도 감격스러웠던 환희의 순간이 잠깐이지만 잊힌 기억 속에서 반짝였다.

엄마 아빠의 계절을 다 져버리고도 마음껏 피어나지 못한 나지만, 이때를 생각하면 장하다는 얘기밖에 나오지 않는다. 잘 버텼다고 위로해 줄 수밖에 없다.


진작 일어날 수 있었던 걸 아껴둔 느낌이라 재활 진도를 서둘러 냈다. 가장 먼저 휠체어에 앉는 연습부터 했다. 다행히 팔 힘은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몇 번의 연습으로도 금방 익숙해졌다. 앉아서 이동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다른 색으로 채울 기회가 생겼다.




1층으로 나가면 산책하기 좋은 길이 나왔고, 옥상에는 바람을 쐴 수 있는 하늘공원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초록에 마음이 설렜다. 이때쯤 찍은 사진에는 웃고 있는 모습밖에 없다. 다만, 실핏줄이 다 터져 새 빨개진 눈과 마르고 찢어진 입술이 얼마나 고된 시간을 보냈는지 간접적으로 알려줄 뿐이다.


아직 다리가 다 굽혀지지 않아 휠체어를 다리까지 쭉 뻗고 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딜 가도 민폐인 기분이었다. 직접 경험해 본 바로는 사회가 장애인들을 하나도 배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높은 담, 계속되는 계단과 느린 엘리베이터, 그리고 짧은 보행 신호까지. 건장한 성인 남성이 환자 옆에 계속 붙어있지 않는 한 갈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었다.


물론 그보다도 불편했던 건 날아드는 시선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어쩌다 다쳤냐고 물을 때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휠체어를 끌어주던 엄마의 얼굴을 살피다 그냥 헤프게 웃고 만 적이 많았다.


빨리 나으라고 토닥여주는 손길도 당시엔 같잖은 동정처럼 느껴졌다. 그냥 하는 말일 텐데 나의 아픔이 가벼워지는 것 같아 듣기 싫었다.


방해물은 어찌나 많은지 아픈 사람들이 괜히 집에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불안함에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작은 충격으로도 터져 있는 디스크에 영구적인 손상을 가할 수 있고, 아픈 곳이 더 아파질 수도 있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도 알 수 없을 고충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겉모습이 멀쩡해 보이면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일 것이라고 예단한다. 소수의 개념 없는 사람들 때문에 진짜로 불편한 약자들이 피해 보는 일은 없길 바란다.


예를 들면, 버스와 지하철의 노약자석 같은 거.

앉고 싶어서 앉는 게 아니라 어디에라도 무조건 앉아야 하는 몸이라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그러니까 너무 눈치 주지 말자.

기껏 기분전환하러 나왔는데 더 아파져서 들어가면 얼마나 좌절스럽고 힘이 들겠나.


우리나라의 교통 약자들을 위해 작금의 실태가 정말 최선인지 돌아봐야 할 때다. 고쳐야 할 부분은 고쳐나가야 한다. 언제까지고 그들이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게끔 방관하지 말자.




때마침 옆 병상에 새로운 친구가 들어왔다. 볼살이 통통하고 예뻐서 마치 인형을 닮은 듯 한 여자아이였다. 나이는 3살 정도 돼 보였는데 뇌 수술을 하기 위해 왔단다. 그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아서 자세한 건 묻지 못했다. 반가운 감정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공기가 가라앉았다.


세상에 나쁜 놈들 많은데.


어떻게 이렇게 천사 같은 아이들만 쏙쏙 골라서 모질게 구는지... 만약 신이 있다면 가서 따지고 싶었다.


그 아이는 내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주었다. 같이 퍼즐 맞추기도 하고 색칠 공부도 하다 보니 집에 있는 동생 생각이 났다. 하나뿐인 동생이라 내가 많이 아꼈다. 하루 종일 집에만 갇혀 있는 날에도 동생과 함께라면 지루하지 않았다. 동생은 내 말을 잘 따라주었다. 먼저 제안한 놀이도 같이 재미있게 해 주고, 먹고 싶다고 한 간식이 있으면 척척 만들어주었다.


크면서 마찰 한 번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다른 어떤 형제와 비교해도 우애가 깊었다.

'이 나이 때 참 예뻤었는데. 그새 다 잊어버리고 있었어.'

집에 돌아가면 동생에게 꼭 잘해줘야겠다고 주먹을 쥐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도저히 잡히지 않던 수치가 점점 안정되고 있었다. 다음 주 퇴원을 목표로 하루하루 건강한 마음을 유지했다. 다시 올라간 하늘 정원에는 가슴이 뻥 뚫릴 듯 시원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병 온 가족들과 편의점에서 데워온 컵밥을 나눠먹었다.

남들 입맛에는 싱거워도 내내 병원밥만 먹던 나에겐 그 한 끼가 특식처럼 느껴졌다. 정말 맛있었다.


처음엔 한 숟가락으로 시작해서 다음엔 열 숟가락, 그다음엔 한 그릇, 그다음에는 밥 추가까지. 오래 걸리지 않아 식성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퇴원하고서부터는 하루마다 1kg씩 착실히 몸무게가 늘어갔다. 홀쭉해졌던 허리도 웬만한 바지를 줄이지 않고 입을 수 있을 만큼 예뻐졌다.


매일 걷는 범위를 늘려갔다. 병실 안에서만 몇 발자국 걷다가 이후에는 병원 한 층을 다 돌 수 있을 만큼 연습했다. 대형 못이 무릎에 박힌 듯 삐걱거리고 아팠지만 오늘 걸은 만큼 내일은 더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희망이 되었다.


사실, 그러다 퇴원한 날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소변줄 여분을 받아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돌아와 겨우 간 화장실에서, 혼자 힘으로 볼일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린 것 밖에는.


그때는 정말 행복했었다.

내 인생에 불행은 더는 없을 것 같았다.


혹시 여전히

밤 중에 빛을 찾아 걷는 독자들이 있을까 봐,

힘들 때 들었던 생각들을 바탕으로 몇 자 적어본다.


TO. 삶이 힘든 너에게

슬픔에 무뎌지지 않는 게

긍정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듯 해

울고 싶을 땐 우는 것도 나쁘지 않아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야

답답하고 막막할 때 많겠지만
지금이 끝이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해

좋은 날이 올 거야
힘들었던 만큼 행복해질 거야

정말 그럴 거니까
더는 걱정하지 마

괜찮아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안 봐도 뻔 해
TO. 현재가 불안한 너에게

나, 젊은 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쓸데없는 것에 오래 허덕이다 와도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까?

현재를 버텨내는 데에만
온 힘을 쏟아야 해서 그런데

혹시 괜찮다면,
너그러이 기다려줄래?


응, 그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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