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이 익숙한 자리

by 물오름달

무르익은 시간에는 그만의 향이 스민다. 길을 거닐다 문득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가 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거 내가 대학생 때 살았던 숙소 냄새인데.'

'저번에 정선으로 여행 갔을 때 냄새난다.'

'갑자기 생각났어. 한창 열심히 공부하고 일할 때 자주 갔던 도서관 냄새가 딱 이랬거든.'

'걔 생각이 갑자기 나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잊고 있던 기억이 낯선 공간에서, 낯설지 않은 향 때문에 다시 되살아나는 순간. 나는 이따금씩 찾아오는 이런 순간을 마법이라 부른다.


많이 지나쳐왔다고 생각했던 날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질 때, 사람은 나이만 먹을 뿐 마음은 그대로라는 사실을 아프게 실감한다.


예쁘게 사랑했던 내가, 모든 일에 열정적이었던 내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반짝이고 있음을 깨닫는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곁에 얼마나 특별한 향이 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야 빛바랜 추억에 고유의 향이 덮어지는 것이니까.

당시에는 아무리 집중해도 느낄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그래서 더 설레는 게 있다.


내일의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 질문이 나를 바쁘게 움직이게 만든다. 오늘 하루를 조금 더 의미 있게 살아낸다면, 분명 오늘의 향을 떠올리며 짓는 표정에는 평온함이 깃들어 있을 테다.




내겐 자주 가는 단골 카페가 하나 있다.

마음이 소란할 때 가는 카페, S

매일 아침. 가게 앞에 있는 큰 화분에 아르바이트생이 나와 물을 주는 이곳은, 동네에서 커피가 맛있기로 소문이 났다. 대중적인 브랜드 커피숍만 전전하던 내가 속는 셈 치고 다녀왔던 카페는 단번에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잔잔한 음악과, 감성적인 인테리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커피 원두의 냄새는 절로 사색에 잠기게 만들었다. 하루는 비가 오는 날 창가 자리에 앉아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며 글을 썼다.

두 시간 가까이 작업을 하면서 고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장소가 좋으니 내가 하는 일까지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후 하루에 두 번씩 같은 카페를 방문했다. 들어갈 때마다 직원은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이런 가벼운 인사마저도 인색해진 사회에서 환영받는 기분은 마음의 온도를 기분 좋게 데웠다.


매일 다른 메뉴를 주문했다. 따뜻한 차 한잔을 시켜도 우드 트레이(Wood trat)에 유리 티팟(Glass teapot)과 유리 티컵(Glass teacup)을 내어주는 곳이었다. 가격대가 있는 편이었지만, 그만큼 대접받는 느낌이 나 좋았다.


커피도 소문대로 다른 곳보다 훨씬 맛있었다. 직접 볶은 원두도 깔끔하게 포장해 팔고 있었다. 그만큼 맛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베스트라고 표시된 바닐라빈 라테를 시켰다. 고운 라테 아트가 담긴 잔을 입에 대고 한 모금을 머금은 순간이었다.


...!!

유난히 뜨거워 혀 끝이 덴 듯 얼얼했다. 평소 뜨거운 라테를 좋아해서 이곳저곳을 찾아 헤맸지만 매번 성에 차지 않는 온도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밖에서 사 먹는 라테는 뜨겁지 않다는 인식이 생겨버렸다. 입천장을 다 데이고도 속으로는 무척 반가웠다. '여기다. 내가 찾던 곳.'


그 맛을 잊지 못한 나는, 다음 날 문 여는 시간에 딱 맞춰 들어갔다. 번호가 불리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카운터로 향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컵 받침 밑에 작은 티스푼 하나가 올라가 있었다. 전날 뜨거워하는 모습을 봤는지는 몰라도, 세심함이 돋보이는 배려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카페까지 걸어오는 길이 너무 예뻐서, 집을 나서면 산책하는 기분이 절로 든다. 이 장소가 너무도 익숙해져서 만약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대체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것 같다.


집처럼 편안하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향을 찾아오는 곳. 이곳은 나를 품어내는 정갈한 둥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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