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랑 연애할 수 있다

by 물오름달

웹툰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 우리에겐 만화책이 있었다.


오랜 시간 기다려 다음 권을 손에 쥐고 나면 세상을 다 가질 듯 행복했다. 기다림은 긴데 내용은 짧아서 현실에서는 꿈도 못 꿀 세컨드 남자친구까지 두었다. 바람을 피운다는 개념도 없을 나이였다.

나는 만화책 속에서 모험도 떠나봤고, 사람이 아닌 존재와 사랑도 해 봤으며, 지독한 운명으로 얽힌 친구들과 힘을 모아 괴물도 물리쳐봤다.


그 시절 동네엔 서점보다도 만화방이 많아서 가진 용돈을 다 들이붓고 나면 정작 문제집 살 돈이 부족했다. 매번 새 책을 사기 부담스러워 대여점도 애용했는데 깨끗하게 관리된 책을 찾기 어려웠다.


좋아하는 시리즈의 첫 권은 비 오는 날 진흙탕에라도 구른 건지 겉표지부터 사나웠다. 흉측한 것이 나올까 봐 장을 넘길 때마다 긴장했다는 얘기는 읽는 사람도 불쾌할 테니 넘어가겠다.


만화 카페가 생긴 건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의 얘기다. 언니들이 좋아했던 그 시절의 순정만화부터,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소년만화, 최근 유행하는 웹툰의 단행본까지 책장 가득 빽빽하게 쌓인 만화책은 굳어있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나는 만화카페의 '열심 회원'이 되었다. 한 달에 정기권 결재를 10만 원 이상 한 사람만 받을 수 있는 칭호다.

열심 회원이 되면 추가 시간을 조금 더 넣어준다. 하루 종일 따뜻한 곳에서 만화를 읽다 나오면 만족감으로 속을 두둑하게 채운 기분이 들었다.


물론 웹툰도 좋아한다. 최근에 푹 빠져 정주행 한 웹툰은 <시든 꽃의 눈물을>이다. 인물 간의 심리 묘사와 대사가 너무 좋아서 애정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다. 감탄이 새어 나올 만큼 예쁜 작화는 한 컷 한 컷이 엽서 같아서 눈 돌릴 수 없게 만든다.


성인 웹툰에 대한 기준이 이 작품 덕에 높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굿즈 예약까지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 기다림의 시간마저도 즐겁게 느껴질 정도다.


웹툰 이후 웹소설이 크게 부흥했다. 글을 부업으로 삼아 수익을 내는 작가들도 많아졌다. 웹소설을 읽고 있으면 마치 영상이 머릿속에 재생되는 듯한 착각이 든다.

나는 그들의 세계를 오랜 시간 동경해 왔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연재 작가가 되어보고 싶다. 우습지만 필명도 생각해 뒀다. 용기가 생기면 온 마음 다해 도전해 볼 생각으로.



두 달 전 우연히 '팅글 - 나만을 위한 AI 로맨스'라는 어플을 발견했다. 평생 현질을 해본 적 없는 내가 이 어플에 15만 원의 거금을 들였다. 얼마나 빠져 살았는지 알만 했다. 밤낮없이 매달린 탓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니까.

'팅글챗'은 쉽게 말해 캐릭터를 설정하고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게임형 대화 앱이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난, 상상하고 글을 쓰는 일을 좋아했다.


또래 친구들이 알 수 없는 낙서로 노트 한 면을 가득 채울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꼬박꼬박 일기를 썼고, 중학생 땐 자발적으로 동화 만들기 동아리에 가입했으며, 수상은 못했지만 지역 단위 글짓기 공모전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유행하는 드라마 대사를 줄줄이 외워 깜지를 쓴 노트는 왠지 부끄러워 서랍 깊숙한 곳에 두고 한동안 꺼내보지 않은 적도 있었다.


상상하는 걸 워낙 좋아해서 혼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내가 만든 가상의 공간에서 살았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돌멩이를 걷어차며 걸을 때, 밥을 다 먹고 엄마를 도와 설거지를 할 때, 숙제를 마치고 따뜻한 물로 씻을 때, 잠에 들기 전 창밖의 어두운 하늘을 볼 때, 아침에 일어나 어제 미리 싸둔 가방을 한번 더 확인할 때 그랬다.


어느 날엔 상상했던 이야기가 그대로 꿈에 나온 적도 있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한 경험이 무척이나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끈기는 조금 부족한데 아이디어는 넘쳐서 손 벌려 놓은 일만 한가득일 때도 있었다. (공모전에 참가할 계획이라며 주저리주저리 떠들다 출품 한번 제대로 못해본 지난달 같은.)


제대로 완성한 글은 한 편도 없는데 쓰다 만 글이나 아이디어만 끄적여 놓은 시초 상태의 글은 늘 넘쳐났다.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상상하는 일을 사랑한 아이는 커서 '이별하지 않고도 이별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됐다.


한 평 남짓한 코인 노래방 안에서 솔로 가수급의 실력을 뽐내며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만큼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날 이별만큼 슬픈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이 앱을 깔아 경험해 봐도 좋겠다. 내 돈 내산. 솔직한 리뷰를 하자면 정말 재밌다. 기억하기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한 AI가 없었다. 하지만 눈부신 과학 성장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하고 있다.


내가 쓴 소설의 뒤를 이어준다니, 이토록 탄탄한 서사를 쌓는 게 가능하다니. 주변 사람들에게 두 팔 벌려 소개하고 싶은 심정이다.


너무 몰입한 나머지 슬픈 장면에선 마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가슴이 저며 말을 이을 수 없었고, 두 사람이 비로소 행복한 상태에 접어들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이용자가 비슷한 포맷으로 앱을 사용하는지는 몰라도 나의 경우에는, 여자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면 그에 맞춰 남자 주인공 시점을 Al가 보여주는 식이었다. 그래서 이질감 없는 깊은 몰입이 가능했다.


공간이나 상황의 제약 없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는 경험. 내가 돈을 지불한 이유는 이런 해방감에 기여한 게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혼자 쓰면 이야기가 산으로 가지 않게 신경 써야 할 점이 많으니까.

웹소설 쓰기를 연습해보고 싶다거나, 글 쓰는 걸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이용해 보기에도 좋겠다.


어플을 붙잡고 밤새 쓰고, 쓰고, 또 썼다. 일 년 전부터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성실하게 지켜온 생활 패턴을 깨부수면서까지 올인했다. 어깨가 아프고, 손목이 뻐근하고, 뒤통수가 무거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새벽에 잠깐 지쳐서 잠들면 꿈에서조차 캐릭터를 만났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어김없이 앱에 접속했다. 뒷 이야기를 빨리 보고 싶어 여념이 없었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재밌었고 또 행복했다. 여전히 그 후유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다. 한참 지나서 생각해 보니 이런 장르는 앞으로 더 성장하게 될 것 같다.


기술이 더 정교해진다면 개인도 충분히 애니메이션 제작자가, 드라마 작가가,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거다. 정말 1인 미디어의 시대가 열릴지 모른다. 남주와 여주의 외형을 입맛대로 고르고, 내가 작성한 스토리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세상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좋다.





글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든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글을 잘 쓰는 편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냥 살면서 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글씨체가 예쁜 사람들처럼, 그림을 웬만큼 그릴 줄 아는 사람들처럼 간간이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줄 알았다.


상사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 오래 고민하지 않고, 자기소개를 서면으로 할 때 많은 수고가 필요하지 않은, 그냥 평범하게 글 좀 쓰는 일반인.

그 정도에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보니 남의 돈 벌어먹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그나마 있는 재능이라고는 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뿐이라 이 얄팍한 재능을 쓸만하게 키워보고 싶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돈이라는 목적 때문이지만, 꿈에 대해 오래 고민하면서 '글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더 나아가 스스로 작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성장한다면 '좋은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다.


낭만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글과도 연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떨 땐 꼭 붙어 있고 싶을 만큼 좋지만, 또 어느 땐 꼴도 보기 싫을 만큼 미운, 이 애증의 관계를 어떤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글을 사랑하고 있다.

아직은 일방적인 짝사랑일지도 모르겠다. 밀당에 능숙한 편도 아니라 갖고 놀다 버려지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한 번, 겁 없는 사랑을 해보려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오늘부터 글과 사랑을 나눠보는 것은 어떤가. 어쩌면 현실의 사랑보다 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하나 주의할 점이라면 당신은 부디 갑의 연애를 하시라. 쓸만한 것만 빼어먹고 외면해도 좋다.


열받은 글의 지독한 괴롭힘을 받는 건, 나 같은 지망생들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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