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이야기다.
6학년을 앞두고 제법 선임다워진 나는 여유롭게 학교 곳곳을 드나들었다. 층층마다 자리한 화장실의 위치뿐만 아니라 청결 상태까지 모두 외운 진정한 선배. 그런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한 후배가 생각난다.
방과 후 영어 수업이 끝난 직후였다.
당시에 나는 소규모 영어 수업에 매주 금요일마다 참석했는데, 별관 꼭대기 층에 남는 교실을 사용하곤 했다. 수업비가 있었는지, 있다면 얼마 정도였는지 같은 건 기억나지 않는다.
따로 다니던 영어학원에서는 영어에 대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우연히 실력보다 잘 본 시험지 한 장으로 수준보다 높은 반에 들어간 탓이 컸다.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Yes or NO'와 같은 단체 대답만 열심히 뻐끔대다 나온 적도 있다.
수업 분위기도 살벌한 편이었는데, 주어진 문장을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자기 생각을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대답한 학생은 그대로 눈총을 받으며 남은 시간 내내 서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학교 방과 후 수업만큼은 달랐다.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수업 내용도 교과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남녀 성비가 딱 맞아 종종 재밌는 게임을 하기도 했다.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던 그날은 특별한 보물 찾기를 했다. 문제를 풀면 한 글자씩, 보물이 숨겨진 위치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B E H I N D - T H E - B O A R D'를 모으기 위해 애쓰는 식이었다.
선생님은 우리가 싸우지 않도록 1인 1 보물을 준비해 각기 다른 장소에 숨기셨다. (참으로 현명하시다.)
규칙은 두 가지였는데, 절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했다. 연필을 쥐고 정직하게 문제를 풀어 랜덤으로 한 글자씩 획득한 뒤, 최종 위치를 알아내야만 보물을 확인하러 갈 수 있었다.
남은 규칙은 보물 찾기에 성공한 순서대로 숙제가 줄어든다는 것. 피 터지는 개인전의 서막이었다.
운 좋게 내가 일등을 차지했다. 평소엔 승부욕이 없는데 이기고 나니 도파민이 미친 듯이 생성됐다. 그렇게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며 텅 빈 복도를 걷는데 저 멀리서 어린 여자아이가 울먹이고 있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이름도 묻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충 동생의 친구쯤으로 보여 지나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잠시 날 경계하더니 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에 목도리가 있어요."
잠시 교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앞문에 2 - 3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날이 추운 겨울이었고, 아이는 목도리가 필요한 듯했다. 아니면 내일이 주말이라 목도리를 놓고 온 것이 불안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불 꺼진 교실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진작에 퇴근하신 모양이었다. 그 순간 나한테서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찾아줄게."
멋진 선배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했다. 열린 창문이 있다면 진입할 생각으로 흔들어보았다.
꼼꼼하게 잠겨 있었다. 다행이었다.
바로 아이의 손을 이끌고 2학년 선생님들이 모여 계시는 교무실로 향했다. 내 동생은 같은 학교 2학년 1반에 재학 중이었는데, 열심히 업무를 보고 계신 선생님 곁애 다가가 인사를 드리니 나를 알아보셨다.
그 후엔 일사천리였다. 선생님은 교실 열쇠를 찾아 내 손에 쥐어주셨다. 순간 시선을 내리니 아이의 얼굴에 안도가 스치는 게 보였다.
"다음부터 이런 일 있으면 교무실에 찾아가 아무 선생님한테나 부탁드리면 돼."
꽤 멋있게 무게를 잡으며 아이와 걸어가는데 뒤늦게 나온 영어 교실 친구들이 보였다.
'여기서 뭐 하냐.'
'동생이냐.'
묻는 듯한 표정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불 꺼진 교실에 들어서자 한기가 돌았다. 난방이 꺼진 겨울의 교실은 이렇게나 춥다는 걸 실감하며 분홍색의 목도리를 집어 들었다. 나는 서툰 손길로 아이의 목에 정성스레 목도리를 감아주었다.
처음엔 존댓말을 하던 아이가 헤어질 땐 고맙다며 반말을 했다. 손을 마주 흔들어주면서 도와주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별 거 아닌 일로 내가 꽤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그 순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 준 그 아이가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던 아이와의 인연은 한번 더 이어졌다. 그날은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다 (말 그대로 뒤적이기만 했다.) 나오는 길이었다. 신발을 갈아 신고 있는데 누가 내 팔을 툭툭 쳤다. 뭐지 하고 보는데, 그 아이였다.
핑크색 목도리는 어디 팔아먹었는지 찬 공기에 붉어진 목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이번엔 용돈 주머니를 잃어버렸단다. 내가 경찰도 아닌데 그걸 나한테 이르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잠시, 오죽하면 나에게 말을 했겠나 싶어 이번에도 같이 찾아보자 하였다.
잃어버린 장소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소식과 함께 학교 곳곳을 들쑤셨다. 돈을 잃어버린 사건은 학교 안에선 꽤나 중대한 일이었다. 아마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아시면 놀라 자빠질지도 몰랐다.
'내가 개입해도 되는 걸까?'
이미 누군가 훔쳐 갔을 수도 있고, 떨어진 주머니를 습득했을 수도 있으며, 다신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증발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줄을 이뤘다.
하지만 초조한 티는 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믿음직한 '선배'니까.
교실, 복도, 화장실.
아이의 행적을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주머니 같은 건 없었다. 조금 더 자세히 생김새에 대해 캐물었다. 노란색 끈이 달려 있는 어두운 팥죽색의 손바닥만 한 주머니라고 했다. 방수가 되는 재질이라는 힌트도 주었다.
돈을 왜 주머니 속에 두고 그 주머니를 손으로 들고 다닌 거냐고 꾸짖고 싶었지만, 아이의 눈동자엔 눈물방울이 맺히기 직전이었으므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학교 뒤편 우유 저장고였다. 우유 급식 세대라 점심시간마다 당번들이 우유를 가져와야 했는데 마침 오늘이 아이 차례였단다. 여긴 아닐 것 같은데, 하는 마음으로 뒤적이다 구석에서 많이 더럽혀진 팥죽색의 주머니를 발견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이의 눈치를 봤다. 더럽게 묻은 흙을 내 엉덩이에 대충 닦아내고 아이에게 건넸다. 하지만 내 우려와는 다르게 아이는 주머니를 기쁘게 받아 들었다.
혹시 괴롭힘을 당하는 거 아닐까? 하는 노파심에 주머니를 열어 용돈을 확인해 보라 일렀다. 반쯤 벌어진 주머니 틈 사이로 세종대왕 두 분이 보였다.
아, 나보다 더 부자였구나.
어쩐지 지난번에 찾아준 목도리가 꽤나 두툼하고 부드러운 것이 꽤 비싸 보이긴 했어.
아이의 표정에서 나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읽었다. 고작 2학년 짜리가 나보다 더 부자인 것에 불만을 가질 뻔했지만 선배답게 성숙한 모습으로 인사하며 헤어졌다. 속으로 그저, 비슷한 일을 또 겪지 않길 바라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연히라도 몇 번 더 볼 줄 알았던 얼굴은 졸업 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찾아가서 서성였다면 어떻게 지내나 알 수 있었을 텐데, 6학년이 됐을 때부터 후배 교실에 찾아갈 수 없다는 교칙이 생겨버렸다.
괜히 위압감을 조성하려 본인들보다 덩치 작은 동생들 근처를 왔다 갔다 하는 질 나쁜 몇몇이 있었기 때문이다. 걔네들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보다 행복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 아이는 조금 덤벙대긴 했어도 착했으니까 학교 생활을 잘했을 거다. 성인이 되어 바쁘게 자기 삶을 꾸리고 있겠지. 키는 나보다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가끔씩 생각난다. 날이 추워지고 목도리를 두를 때가 되면 되살아나는 기억이다.
그 아이는 날 기억할까? 기대는 하지 않겠다. 나한테는 5학년 때의 일이었지만 걔한테는 아주 어릴 적 이야기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누군가의 처음과 서투름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기분은 나쁘지 않다. 지금은 마음 쓰일 다음 후배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