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지지 않아
길가에 잔뜩 심어진 꽃나무들이 발화하는 소리.
그 짙은 향훈이 세월을 넘는다.
어릴 적 내 별명은 기상청이었다. '오늘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 할 수 있을까?'가 최고의 관심사인 아이들에게 오늘 비 온다, 안 온다 신령처럼 딱 집어 얘기해 주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과학적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기상청보다 정확했다.
"야, 오늘 비 온다는데 진짜야?"
"힝, 선생님이 축구시켜 주신댔는데."
애타는 반응이 웃겨서 답을 알면서도 시간을 끌었다. 무릎의 시린 정도와 통증이 시작된 시간을 유심히 살피면 날씨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내 생각엔 오늘 비 안 올 것 같은데? 그냥 하루 종일 흐리고 말 것 같아. 비가 온다면 내일 새벽쯤이려나?"
이런 질문도 한두 번이어야지, 내 예상이 들어맞는 걸 여러 차례 경험한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내 능력을 인정해 줬다. 뭐라도 된 것처럼 그게 또 신이 나서 헤프게 웃고 말았다.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의 대표작 중 하나, [날씨의 아이]가 떠오른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처럼 날씨를 맑게 할 재주는 없지만 날씨를 맞추는 재주 정도는 있으니 나도 날씨의 아이라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혼자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들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영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구나 싶어서.
나는 체육 시간을 가장 좋아하던 아이였다. 매번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중에서도 피구라면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고학년 때 우리는 '피구 리그전'이라는 명목하에 반끼리 치열한 경기가 연이어 펼쳐지는 뜨거운 한 해를 보냈다. 아직도 햇살이 좋은 날엔 그때 생각이 많이 난다.
경쟁 심리를 자극한 리그전은 친구들 사이에서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복도에 붙은 대진표는 확인했느냐, 각 반의 에이스는 누구라더라, 오전 오후 연습은 이렇게 하자 등 모두가 한데 모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수업 중에도 경기소리가 들리면 온 신경이 운동장을 향했다. 가끔 선생님께서 구경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주면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현재 지고 있는 팀'을 소리 내 응원하기도 했다. 열세에 몰린 쪽에 더 정이 가는 건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인 것 같다.
규칙은 프로배구리그랑 비슷했다.
총 3판 2선 승제인데 2:0으로 이기면 승점을 3점 가져가고, 2:1로 이기면 승점을 2점만 가져간다. 그리고 진 팀이 남은 1점을 갖는다.
그렇게 모든 반이 서로 두 번씩 경기를 마치고 나면 지금까지 획득한 점수를 더해 우승자를 가린다.
"야, 대박! 7반 2 반한테 졌대!"
"진짜? 그럼 우리 다음 판 이기면 2등 탈환이야?"
매 경기 결과에 따라 순위가 엎치락뒤치락하니 더 치열할 수밖에. 그 시절 뭐 때문에 그렇게 최선을 다했는지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가끔 회상하다 보면, 반짝이는 모래알 같이 빛나던 에너지가 부럽기도 하다. 그 나이 때에만 가질 수 있는 소중한 마음이니까.
하지만 피구도 나에겐 무리가 되는 운동이었다. 좁은 코트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히고 날아오는 공을 순발력 있게 피하고. 쉴 새 없이 다리를 움직이는데 편할리 없었다. 종종 위험한 상황도 연출되었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하루는 공에 맞아 코트 밖으로 나가다가 삐끗을 했다. 급한 마음에 뛴 걸음을 하다 무릎이 돌아간 것이다.
'아차, 방심했다. 천천히 움직였어도 되는데.'
대차게 넘어진 후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는데 눈앞이 아득하고 어지러웠다. 와중에 공을 넘겨달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 말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아래에 있는 공을 찾아 넘겨줬다. 그때쯤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꼭 무채색이던 세상에 물감이 부어지는 듯했다. 내가 떠나보낸 공이 공중을 날아 코트 안으로 들어가던 모습은 사진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런 경험들이 장애가 됐냐고 묻는다면 난 오히려 삶의 자양분이 됐다고 답할 것이다. 남들보다 많이 넘어져 보면서 일어서는 법도 함께 배웠다. ‘이런 순간들도 이겨냈는데 내가 못 할 게 뭐 있어.’ 하는 생각은 나이가 들수록 나를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 작은 뿌리들이 얽히고설켜 우람한 나무를 만들어 낸 셈이다. 그러니 괜찮다. 이 무릎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테니.
"쟤는 왜 저렇게 뒤뚱뒤뚱 걸어?"
오후 3시쯤 되면 교문 앞은 마중 나온 학부모들로 바글바글하다. 그 사이를 가만히 지키던 엄마가 직접 들었던 말이다. 엄마 눈에도 내가 남들보다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쳐져 걷는 것처럼 보였단다. 하지만 이건 약한 무릎을 지키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반사행동이었다.
오른손과 왼손의 크기가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똑같이 안 좋았던 무릎이지만, 왼쪽 무릎에 힘이 더 없었다. 속상한 마음에 엄마는 내 걸음걸이를 수시로 지적했다. 하지만 표창 같이 날아들던 그 말들을 나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뒤뚱뒤뚱 걷는다는 어감이 창피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고칠 수 없을 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걷는 자세를 신경 쓰다 보면 자꾸만 내가 위축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무릎을 미워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키는 것이었다.
뒤뚱뒤뚱 걷는 건 사람을 둔해 보이게 만든다. 몸무게가 정상 범주에 있어도 더 뚱뚱해 보이고, 어깨가 비대칭을 이루니 옷도 가방도 자꾸 흘러내린다. 가족들은 내가 겉모습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 더 칠렐레 팔렐레 하고 다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일부러 관심이 가지 않게 노력한 것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에 스트레스받아봤자 나만 손해인 일 아닌가. 옹고집을 피우는 사람이 되더라도 마음만은 편하고 싶었다.
소문이 빛보다 빠른 동네에서 살았다. 학부모 여럿이 모이면 꼭 아이들 촌평을 하기 바빴다.
'3반의 누구는 저번에 선생님한테 또 대들었다더라.'
'걔는 친구들에게 너무 막 대하는지 소문이 안 좋다더라.'
'몇 반의 누구누구는 어디가 아프다더라.'
왜 그리 남의 말들을 쉽게 하는지 어른이 되면 이해가 될까 싶었다. 하지만 역시 모르겠다. 남의 자식을 까내려 부족한 자존감을 채우고 위선을 떨기 위함이 아니라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 같이 뭉쳐 있으면 아무리 무례한 말을 해도 괜찮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모두가 가식적인 그곳에서 호이가 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학교 생활을 잘 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아픈 아이로 기억되기 싫었다. 누군가 나를 핑계로 우리 가족을 동정할 거라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그래서 내내 공부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이름 석자 앞에 우등생이라는 칭호를 달고 말거라고. 그렇게 열심히 한 덕에 선생님들의 사랑도 많이 받고 친구들의 부러움도 살 수 있었다. 처음으로 동기가 뚜렷하면 못 해낼 일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친구랑 수다를 떨려고 공원을 찾은 적 있다. 바람이 마구 몰아치는 날이었다. 마땅히 앉을자리가 있을까 둘러보는데 마침 등받이 없는 낮은 장의자가 눈에 띄었다. 원래는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갑자기 의자를 밟고 넘어가고 싶어졌다. 별 이유 없이 그저, 오랜만에 본 친구에게 무릎이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상상한 건 사뿐히 뛰어넘는 것이었는데, 올라간 순간부터 이미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두 발로 착지할 땐 나도 민망할 정도로 큰 쿵 소리가 났다.
아무 일 없었던 척 태연하게 행동하고 싶어서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가는지도 모른 채 일단 떠들었다. 그런데 대화에 집중을 못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날 바라보던 친구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당혹스러움으로 점철된 와중에 측은함이 보였다. 괜한 욕심이 불러온 볼썽사나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무렵, 아득한 무릎 통증이 시작됐다. 고통의 정도는 앉아 있을 때 더 심했다. 시큰거리고, 욱신거리고. 누군가 무릎을 손아귀에 꽉 쥐고 괴롭히는 것 같았다. 통증이 심할 땐 얼굴에도 힘이 들어가 숨 쉬기가 어려웠다. 한 시간 누워 있으면 두 시간은 겨우 앉아 있을 수 있는 상태가 됐다.
언젠가부터 보건실은 내 아지트로 불렸다. 처음에는 무조건 가서 누워있기만 했는데 핸드폰도 없고 대화할 사람도 없다 보니 여간 심심한 게 아니었다. 그다음부터는 손에 뭐라도 쥐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떨 땐 다음 시간 수행평가를 미리 준비하기도 했고, 영어 단어장을 들고 가 외우기도 했다. 사실 여유가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전날에 못다 한 일을 당일에 해결하기 충분했으니까. 시끄러운 교실을 벗어나 피로해진 몸을 녹이기에도 좋았다.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소리를 배경 삼아,
창문 틈으로 부는 바람을 벗 삼아
낮잠을 자 본 적 있는가?
젊고 친절한 보건 선생님은 때마다 수건을 따뜻한 물에 데워 무릎에 올려주셨다. 그게 진통제만큼이나 통증을 잡는데 효과적이었다. 가만히 누워있다 보면 까무룩 잠이 들었다. 종 치는 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깊은 잠이었다.
— OO아, 이제 일어나서 교실로 올라가!
쉬는 시간 종 쳤어.
— 벌써요? 감사합니다.
가끔 자리를 비우신 줄 모르고, 믿고 있다가 쉬는 시간까지 자버려서 아슬아슬하게 교실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보통은 친한 친구에게 '다음 시간 보건실'이라고 말하면 선생님에게 대신 말을 전해주었는데, 간혹 고루하신 선생님들은 직접 자기를 찾아와 사정을 설명하게 했다. 그 뒤로 발급받은 보건증을 검사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절차일 수 있지만 나처럼 하루에도 여러 번씩 보건실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좀 봐줘야 하지 않나?
특히 미술교과를 담당한 남자 선생님이 까다로우셨다. 자리로 찾아갔을 때 한 번에 뵐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훨씬 많았고, 결국 선생님을 찾아 학교 곳곳을 돌아야 했다. 가히 비효율적이라 할 만하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조퇴를 할 땐 미리 조퇴증을 끊어 놓기도 했다. 10분 안에 선생님을 찾고, 짐을 싸고 하려면 너무 바빴다. 그럼에도 혹여 다음 수업시간을 방해할까 걱정이 되었다. 수업 시작 후 교실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꾸지람을 들을게 뻔했기에.
이제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기다리는 한 시간 동안 상태가 호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남아 있는 게 부끄러워서 나온 적도 있었다.
조퇴증은 담임선생님이 끊어주시는 거라 마주치면 “왜 안 갔니?”하고 물어보실 게 뻔한데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도망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괜찮아져서 더 있어보려고요.” 하고 설명했으면 될 일인데 왜 민망해했는지 모르겠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이란 게 정말 있는 걸까?
짐작해 보건대 자꾸 말을 번복하다 보면 혹시 꽤 병으로 오해할까 걱정한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 어영부영 행동하진 않을 것이다. 작고 작은 추억 한 장이라도 더 건질걸.
요새는 그런 후회가 자주 든다. 누구나 가보지 못한 길을 아쉬워하기 마련이다.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계절은 너무도 짧더라.
우리 학교 보건실은 남자 방 여자 방이 따로 나뉘어 있었다. 그래봤자 천장은 뚫려 있고 벽은 가벽이었지만. 오래된 학교라 침구도 낡았고 주변도 지저분했다. 근데 이게 그나마 나은 실상이라는 건 고등학교에 가서야 알았다. 고등학교는 정확히 중학교 보건실의 반만 한 크기에 침대도 도저히 누울 수 없을 만큼 좁았다. 어떻게 이렇게 관리할 수 있는지 누가 와서 보더라도 감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래서 간단한 상처 치료 외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가끔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떠오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게 하나의 취미가 됐다. 적적함을 채우고 가라앉는 기분도 바꿀 수 있어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뭐든 방심은 금물이라고 옛 말 중에 틀린 말 하나 없다.
그날도 보건실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못 한 채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후 물을 마시려 나왔는데 글쎄, 남자방 쪽 침대 하나가 들썩이는 게 아닌가!
망했다!
너무너무 창피했다.
그 당시 내가 느꼈던 수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여기서 일 년 치 이불킥 감을 얻게 되다니!
'내가 방금 무슨 노래를 불렀지? 그보다 쟤는 누구지?'
학년도,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했다.
혹시 쟤는 내 얼굴을 봤을까? 나를 알고 있을까? 후다닥 도망쳐 나와서는 구석에서 제발 모르는 사람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의 최후는 이처럼 잔혹하단 걸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이후로는 선생님이 계시던 안 계시던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더 이상 보건실은 나만의 아지트가 아니었기에.
어쩌면 나보다 더 놀랐을 이름 모를 그에게 이 글을 통해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더불어 소문내 주지 않아 고맙다는 인사도 함께. 소문이라도 났으면 진짜, 학교 못 다녔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