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시간의 방콕 블랙아웃

카오산의 하이에나들, 그리고 달콤한 환상

by 예한

천장의 낡은 실링팬이 규칙적인 파열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커튼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방콕의 아침 햇살이 폭력적일 만큼 강렬하게 망막을 찔렀다.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지독한 숙취. 입안은 모래를 씹은 것처럼 바짝 말라 있었고, 며칠째 빨지 못해 쉰내가 나는 헐렁한 티셔츠는 식은땀에 절어 피부에 들러붙어 있었다. 침대에서 상체를 간신히 일으키며 나는 허탈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이름도 모르는 로컬 클럽에서 구릿빛 피부의 태국 소녀가 씩 웃으며 건넸던 그 양동이. 싸구려 로컬 위스키인 쌩쏨(SangSom)과 정체불명의 달콤한 시럽을 때려 부은 '버킷 칵테일'을 들이켠 이후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방콕 후알람퐁(Hua Lamphong) 역에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였다. 네팔 카트만두로 향하기 전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48시간. 우돈타니의 평화로운 호수 바람은 온데간데없고, 방콕은 도시 전체가 고장 난 거대한 사우나 같았다. 무거운 빅백을 메고 역을 나서자마자 툭툭(Tuk-tuk) 기사들이 파리 떼처럼 달려들었다.


"헤이 마이 프렌드! 카오산 로드? 투 헌드레드 바트!"


터무니없는 바가지요금이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아스팔트 위에서 나는 지지 않으려 악을 쓰며 흥정해야 했다. 간신히 도착한 배낭여행객들의 성지, 카오산 로드는 지옥의 또 다른 형태였다. 거리를 점령한 거대한 스피커에서는 밤낮없이 쿵쾅거리는 베이스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렸고, 공기 중에는 팟타이 기름 냄새와 시큼하고 역겨운 대마초 냄새가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마사지? 핑퐁쇼?"를 외치며 내 팔목을 잡아채는 호객꾼들. 이 카오산의 하이에나들 틈에서, 나는 짐짝처럼 던져진 초라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결국 나는 쏟아지는 인파와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메인 스트리트에서 벗어났다. 골목과 골목을 지나, 네온사인조차 몇 개 없는 깊숙한 뒷골목의 허름한 로컬 클럽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관광객은 나 하나뿐인 듯했다. 에어컨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후끈한 실내, 그곳에 찌그러져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그들이 다가왔다. 구릿빛 피부에 짙은 화장을 한 매력적인 태국 소녀, 그리고 옆에는 놀라울 정도로 단아하고 예쁘장한 일본인 여성이었다. 순도 100% 로컬 클럽에 겁도 없이 혼자 들어와 맥주를 홀짝이는 동양인 남자가 묘한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쿵쾅거리는 스피커 소리를 뚫고 잘되지도 않는 영어로 스몰 토크를 이어갔다. 방콕의 무더위와 호객꾼들에게 시달려 너덜너덜해진 내게, 그녀들의 다정한 호의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그리고 그 태국 소녀가 내밀었던 불량식품처럼 달착지근한 버킷 칵테일. 달콤함 뒤로 알코올의 독한 열기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고, 방콕의 첫날 밤은 거기서 전원이 꺼져버렸다.


이 미쳐 돌아가는 도시 한복판에서 블랙아웃이라니. 나는 허겁지겁 침대 밑에 팽개쳐진 바지 주머니와 배낭을 뒤졌다. 지갑, 여권, 핸드폰. 다행히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무방비 상태의 동양인 여행객을 노린 범죄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 발로 무사히 숙소까지 기어들어 온, 운이 몹시 좋았을 뿐인 안일한 여행객이었다.


혈관을 타고 도는 알코올의 잔여물을 강제로 빼내야 했다. 나는 짐 속에서 구겨진 러닝화를 꺼내 신고 무작정 방콕의 아침 거리로 나섰다.


오전 8시.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 속을 달리자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리고 심장 박동이 빨라질수록, 끊어졌던 필름의 파편들이 러닝의 리듬을 타고 하나둘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아스팔트를 박차는 발소리가 거칠어지자, 클럽의 묵직한 베이스 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때렸다. 첫 번째 기억의 조각.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 아래, 태국 소녀와 나란히 스테이지에 올라가 끈적하고 신나게 몸을 흔들던 내 모습이 떠오르니 얼굴이 붉어지며 페이스가 빨라졌다.


러닝의 호흡이 한계치에 달하며 폐부가 찢어질 듯 아파오자 다음 장면이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장소는 시끄러운 카오산 로드의 한복판. 단아했던 일본인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위스키 병을 내 입에 다짜고짜 들이부었고, 방콕의 밤거리는 속도감을 잃고 느리게 회전했다.


그리고 마지막 파편. 내 입술에 닿았던 작고 부드러운 감촉. 알코올의 쓴맛과 달콤한 향수 냄새가 섞인 채 다가왔던 그녀의 얼굴. 그것이 정말 그녀의 입맞춤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내 알코올성 치매가 만들어낸 달콤한 환상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방콕의 습도처럼 끈적하게 엉켜 있었다.


러닝을 멈추고 거친 숨을 고르며 길가 벤치에 주저앉았다. 휴대폰을 꺼내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어젯밤 교환했던 그녀의 계정에 다이렉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정말 미치도록 즐거운 밤이었어. 네가 내일 네팔로 떠난다고 했지? 히말라야에서의 여정이 안전하기를 진심으로 바랄게.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걷는 트래블러니까, 언젠가 세계 어딘가에서 또 마주칠 수 있겠지. 그때까지 꼭 건강해!]


메시지를 읽는 순간, 숙취로 깨질 듯하던 머릿속이 기묘할 정도로 맑아졌다. 방콕은 위험하고 무서운, 사기꾼들이 득실거리는 아수라장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나를 노린 사냥꾼이 아니었다. 단지 내가 이 도시의 광기에 기꺼이 몸을 던졌을 뿐이고, 우리는 아주 우연히 서로의 궤도에 교차해 미친 듯이 빛나는 하룻밤을 보냈을 뿐이다. 방콕이 아니었다면 평생 겪지 못했을, 아찔하고도 낭만적인 블랙아웃.


다음 날 아침, 나는 여전히 남아있는 숙취에 헤롱거리며 무거운 배낭을 메고 수완나품 공항으로 향했다.


카트만두로 향하는 비행기는 스리랑카의 콜롬보를 경유하는 일정이었다. 스리랑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PP카드를 꺼내 들고 라운지로 직행했다. 방콕의 그 끈적하고 시끄러운 거리와는 정반대인,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조용하고 무균실 같은 공간. 나는 그곳에서 따뜻한 음식을 짐승처럼 집어삼키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뉘었다. 철저한 고립 속에서 맛보는 달콤한 회복의 시간이었다.


라운지의 통유리창 밖으로 스리랑카의 붉은 태양이 저물어갔다. 이제 탑승구가 열리면, 나는 뜨겁고 미쳐 돌아갔던 동남아시아의 열기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어젯밤의 그 달콤했던 위스키 맛과 흐릿한 입맞춤의 기억을 방콕의 골목길에 남겨둔 채, 나는 마침내 네팔행 비행기에 올랐다. 인간의 얄팍한 쾌락이나 가벼운 인연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 차갑고 거대하며, 완벽하게 고요한 신들의 성소, 히말라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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