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의 마지막 MSG, 그리고 데이터 없는 태국의 차가운 치킨
방비엥을 떠나는 날 아침. 나는 땅을 치며 후회했다. "왜 이걸 이제야 먹었지?" 전설로만 듣던 '방비엥 샌드위치'. 3만 낍(약 2,000원). 한국 편의점 샌드위치 가격이지만, 비주얼은 거의 폭력에 가까웠다. 손바닥보다 큰 바게트 안에 치킨, 베이컨, 야채, 치즈, 양파, 마늘이 터질 듯이 꽉 차 있었다. 이건 간식이 아니라 '무기'였다.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입안에서 축제가 열렸다. 8천 원을 받아도 절하고 먹을 맛. 이걸 떠나는 날 아침에야 먹다니. 나의 게으름을 탓하며, 꾸역꾸역 위장 속에 라오스의 마지막 맛을 저장했다.
이어지는 해장 로드. 어제 먹고 반한 '카오삐약(라오스식 쌀국수)' 집을 다시 찾았다. 배는 불렀지만, 이 국물을 두고 가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붉은 다대기를 푼 국물에 바삭한 돈까스 토핑. 땀을 뻘뻘 흘리며 그릇을 비웠다. 그래, 이게 라오스지.
짐을 싸는 건 언제나 전쟁이다. 싸도 싸도 줄지 않는 배낭을 보며 한숨을 쉬는데, 숙소의 실세 '마우니'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오빠 간다. 아프지 말고 잘 있어." 녀석의 배를 긁어주며 작별을 고했다. 파어웨이 게스트하우스, 이름처럼 멀리 있지만 마음만은 가까웠던 곳.
비엔티안행 툭툭에 오르려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지겹도록(좋은 의미로) 마주치는
'아미 커플(예진, 민욱 님)'. "어? 또 만났네요?" 이쯤 되면 인연을 넘어 운명이다.
루트가 달라져서 진짜 마지막 작별인 상황. 그들이 주섬주섬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쇠고기 다시다.' "여행하다 보면 한국 맛 그리울 때 있을 거예요. 그때 쓰세요."
와... 눈물이 핑 돌았다. 라면 스프도 아니고 다시다라니. 이건 진짜배기다.
그들이 건넨 건 조미료가 아니라, 타국에서 서로를 챙기는 한국인의 정(情)이었다.
"한국 가면 꼭 밥 한 끼 해요!" 우리는 훗날을 기약하며 뜨겁게 안녕을 고했다.
비엔티안에 도착하자마자 국경을 넘으려 했지만, 연락 한 통이 발목을 잡았다. 4화에서 납치 미수 사건을 겪고 헤어졌던 포르투갈 친구, 주앙이였다.
"Amigo! 나 지금 비엔티안이야. 밥이나 먹자!"
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털보였고, 여전히 유쾌했다.
"밥은 무슨, 여기 트릭아트 뮤지엄이 죽인다던데?"
다 큰 남자 둘이서 뜬금없이 트릭아트라니. 하지만 우리는 쇼핑몰 한복판에서 킹콩에게 잡히고, 서핑을 타고, 킹스맨 흉내를 내며 낄낄거렸다. 라오스의 마지막을 이 유쾌한 친구와 보내게 된 건 신의 선물이었다.
아마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우리는 진짜 작별을 했다.
"See you next time, Amigo." 그의 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남았다.
이제 진짜 떠날 시간. 라오스 국경 사무소에서 1만 낍을 찔러주고 도장을 받았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태국이다. 등에 멘 배낭이 어깨를 짓눌렀다. 짐을 내렸다가, 검사받고 다시 메고, 버스 타고 이동해서 또 내리고... 이 반복된 과정 속에서 라오스의 낭만은 휘발되고, 현실의 피로가 몰려왔다.
태국 농카이를 거쳐 도착한 도시, 우돈타니(Udon Thani). 화려한 도심 불빛이 보였다.
'그래, 태국은 미식의 나라지! 야시장 가서 맛있는 거나 먹자!'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내 스마트폰은 벽돌이 되었다.
"No Service."
유심을 사려고 편의점(세븐일레븐)에 들어갔지만, QR 결제도 안 되고 오직 현금만 받는단다. 환전도 못 했는데. 겨우 트래블월렛을 충전해 유심을 샀지만... [심카드 인식 실패]
"아악!!!!"
길거리 한복판에서 육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데이터가 없으니 지도도 안 되고, 번역기도 안 되고, 그랩(Grab)도 못 부른다. 나는 21세기의 미아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짐을 던져놓고 야시장으로 나왔다. 여전히 데이터는 먹통. 지나가는 상인에게 구걸하듯 핫스팟을 빌려 겨우 치킨 한 조각을 샀다. 어두운 야시장 구석 테이블. 연결이 끊겼다 붙었다 하는 핫스팟에 의지해 한 입 베어 문 치킨은... 차가웠다. 라오스에서의 그 따뜻했던 샌드위치, 뜨거웠던 쌀국수, 그리고 사람들의 온기. 그 모든 게 국경 하나 넘었다고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식어버린 닭고기를 씹으며 생각했다. 아미 커플이 준 '다시다'를 뿌리면 이 맛이 좀 나아질까? 아니, 지금 필요한 건 조미료가 아니라 데이터다. 화려한 태국의 불빛 아래,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라오스가 주었던 다정한 환상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진짜 생존이다. 웰컴 투 타일랜드.
아니, 웰컴 투 헬(Hell)로 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