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짚라인과 방비엥의 마스코트 마미, 그리고 도하의 기적
"형님, 지갑 넣으세요. 아직 아닙니다."
아침 9시. 액티비티 예약을 위해 나선 길, 지훈이가 내 손을 막았다.
평소의 나였다면 "얼마요?" 묻고 바로 냈겠지만, 오늘은 전략가가 옆에 있다.
그는 투어사 서너 곳을 돌며 가격과 옵션을 엑셀 돌리듯 분석했다.
"A사는 40만 낍, B사는 38만 낍... 보험 포함 여부는..."
시장 조사가 끝나자 그는 가장 조건이 좋은 여행사 사장님과 담판을 지었다.
"우린 현금 박치기다. 내일 다른 팀도 소개해 줄 수 있다. 이 가격에 해달라."
결과는 대성공. 남들이 내는 가격의 70% 수준으로 버기카, 짚라인, 카약킹까지 '풀 패키지'를 끊었다.
"와... 너 뭐 하는 놈이냐?"
"적정가입니다. 더 주면 호구예요."
든든하다. 이 친구와 함께라면 내 지갑도, 내 멘탈도 안전할 것 같다.
지훈이 덕분에 싸게 빌린 버기카의 핸들을 잡았다. 방비엥의 오프로드는 어제 오토바이로 겪어봐서 알지만, 네 바퀴로 달리는 맛은 또 달랐다.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고,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우리는 고글을 쓰고 영화 <매드맥스>의 워보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질주했다.
"형님! 속도 줄이세요! 앞차 먼지 먹습니다!"
조수석에서 지훈이가 잔소리했지만, 엑셀을 밟는 내 발은 멈추지 않았다.
진흙 범벅이 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우리는 낄낄거렸다.
어제 배탈 나서 죽어가던 그 창백한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하이라이트, 짚라인. 방비엥의 울창한 정글 위를 가로지르는 코스였다. 안전장비를 차고 타워 위에 서니 발아래가 까마득했다. "간다!" 허공으로 몸을 던지자, 바람이 온몸을 때렸다. 발아래로 블루라군과 정글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와아아아악!!!" 짜릿했다. 마치 타잔이 된 기분. 속도감은 엄청났고, 풍경은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그 환상적인 뷰를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형님, 여기 뷰 미쳤는데요?" 지훈이도 신나서 소리쳤다.
그때 우린 몰랐다. 우리가 매달린 이 줄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나중에 알게 된 사실] 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된 건데, 우리가 탔던 그 짚라인 코스에서 불과 몇 달 전, 기계 결함으로 여행객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뷰 죽인다!"며 허공에서 발을 동동 굴렀던 것이다. 만약 그때 알았더라면? 절대 못 탔을 것이다. 역시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짚라인의 추억은 짜릿함과 서늘함이 공존하는 기억으로 남았다.
온몸이 진흙과 땀으로 젖은 채 숙소 '파어웨이'로 돌아왔다. 지친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준 건 숙소 사장님도, 직원도 아니었다. "마미!" 이 숙소의 마스코트이자 실세. 주먹만 한 아기 강아지 '마미'였다.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내 발등에 턱을 괴는 녀석을 보자, 짚라인의 공포도, 버기카의 피로도 싹 녹아내렸다.
"그래, 오빠 왔다. 밥 먹었어?" 마미의 배를 긁어주며 잠시 힐링 타임을 가졌다.
이 작은 생명체가 주는 위로가, 때론 웅장한 자연보다 클 때가 있다.
저녁이 되자 힐링은 끝났다. 이제 전쟁이다.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대한민국 대 포르투갈. 우리는 스크린이 있는 펍으로 향했다. 이미 약속이라도 한 듯 멤버들이 모였다. 나와 지훈이. 징글징글하게 마주치는 '아미 브라더스' 남자 둘. 그리고 새로운 한국인 커플까지. 총 6명의 '방비엥 붉은악마'가 한 테이블을 점령했다.
상대는 호날두가 있는 포르투갈. 비기기만 해도 탈락인 절체절명의 상황. 전반 5분 만에 골을 먹혔을 때, 테이블 위엔 탄식이 쏟아졌다. 하지만 김영권의 동점 골이 터지자 펍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렀다.
"할 수 있다! 가보자!"
후반 45분이 지나고 추가시간. 손흥민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희찬에게 이어진 패스. 골. 역전 골이었다.
"으아아아악!!!!"
우리는 서로가 누군지도 잊은 채 얼싸안고 뛰었다.
지훈이도 안경이 벗겨질 정도로 소리쳤고, 아미 브라더스는 식탁 위로 올라갈 기세였다.
옆 테이블 외국인들도 엄지를 치켜세웠다. "KOREA! MIRACLE!"
"형님, 저 먼저 갑니다." 지훈이는 8시 30분 기차를 타고 루앙프라방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루트상 다시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아침 러닝을 마치고 기차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주 섰다. 짧은 며칠이었지만, 배탈 난 그를 간호해주고, 고프로를 잃어버린 나를 위로해 주고, 투어비를 반값으로 깎으며 전우애를 다졌다.
서로의 루트를 맞춰보니 얼추 비슷했다. 내가 툭 던졌다.
"야, 우리 이러다 또 보는 거 아니냐?"
지훈이가 씩 웃으며 답했다.
"확률상 꽤 높죠. 인도쯤에서 다시 보시죠."
인도라니. 까마득하게 먼 나라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그는 쿨하게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저 치밀한 녀석의 말대로 진짜 인도에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파트너가 떠나고 나니 방비엥이 갑자기 넓어 보였다. 텅 빈 옆자리를 실감하며 거리를 걷는데, 어제 같이 놀았던 아미 커플을 마주쳤다. "어? 혼자세요? 커피 한잔하시죠!" 그들의 추천으로 간 '카페 아마존'.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빵빵한 와이파이. 역시 한국인은 정보력이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지훈이가 떠나기 전 남겨준 리스트가 있었으니까.
[추천: 오라라(Oh La La) 레스토랑 / 메뉴: 베이비 폭립] 그가 추천한 곳은 역시나였다.
단돈 6만 낍(약 4,500원). 한국에선 상상도 못 할 가격에 살코기가 두툼한 폭립이 나왔다.
한 입 뜯는 순간 뼈와 살이 부드럽게 분리됐다. '이 녀석, 맛집 데이터 하나는 확실하네.'
혼자 밥을 먹으면서도 녀석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물론 고기는 남김없이 다 먹었다.)
배를 채우고 숙소 '파어웨이'로 돌아왔다. 나의 힐링 요정, 똥강아지 녀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미야, 오빠 왔다." 그런데 직원이 지나가며 웃는다.
"Name is Mauni(마우니)."
아... '마미'가 아니라 '마우니'였구나. 뭐 어때, 귀여우면 그만이지.
배가 볼록한 마우니는 내 발치에서 세상 편하게 자고 있었다. 그 평온한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도 수영장 선베드에 누웠다. 유튜브 편집을 하다가, 수영하다가, 다시 눕고. 전략가가 떠난 자리를 '게으름'으로 채웠다. 이것이 솔로 여행의 맛이지.
해가 질 무렵, 메콩강 변을 걸었다. 붉은 노을이 강물을 물들이고, 달이 예쁘게 떠올랐다.
저녁 역시 지훈이의 리스트였다.
[추천: 삼겹살 / 특징: 가성비 갑] 야채와 면까지 주는 혜자로운 구성의 삼겹살 세트가 3만 낍(약 2,300원).
맛은 있었는데... 굽기 조절 실패인지 원래 그런 건지, 겉이 너무 바삭하다 못해 '굳은 젤리'처럼 딱딱했다.
"아, 지훈아. 이건 코멘트에 안 적혀 있었잖아." 혼자 턱근육 운동을 하며 씹어 삼켰다. 그래도 맛은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나는 고민 없이 마사지 샵으로 향했다. 아침에 받고 저녁에 또? 라오스에선 그게 법이다. 이렇게 싼데 안 받으면 유죄니까.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샵에서 시원하게 몸을 풀고 나오니, 밤하늘 위로 열기구가 떠 있었다.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둥실 떠가는 열기구를 바라봤다. 문득 터키의 카파도키아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침에 지훈이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인도에서 보시죠."
터키, 그리고 인도. 내 여행은 아직 한참 남았고, 우리의 인연도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지훈아, 넌 지금쯤 루앙프라방에서 엑셀 켜놓고 저녁 메뉴 고르고 있냐? 보고 싶다, 내 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