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이 수장될 뻔한 날, 그리고 운명적 파트너

덴마크의 영웅 이반, 그리고 방비엥의 제갈공명

by 예한

방비엥의 아침은 루앙프라방보다 거칠고, 또 자유로웠다. 6시 30분. 습한 공기를 가르며 모닝 러닝을 마친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오늘은 얌전히 투어 버스나 탈 날이 아니다.' 곧장 오토바이 렌탈 숍으로 가서 가장 튼튼해 보이는 녀석을 골랐다. 10만 낍(약 8천 원). 타이어 상태를 체크했다. 방비엥의 길은 도로가 아니라 '진흙과 자갈의 전장'이기 때문이다.


마을을 벗어나는 나무 다리는 삐걱거렸고, 도로는 엉망이었지만, 엑셀을 당기는 손맛은 짜릿했다. 내비게이션? 데이터가 끊겨서 먹통이다. 그냥 감으로 간다. 나는 '러너'니까.


블루라군 1을 찍고 향한 곳은 '남싸이 전망대'. 말이 전망대지, 이건 거의 암벽 등반 수준이었다. 크록스 하나 신고 진흙길을 기어올랐다. 베트남 판시판 산을 정복했던 내 종아리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20분 만에 도착한 정상. 그곳엔 오토바이 한 대가 뜬금없이 박제되어 있었다. (대체 누가 이걸 여기까지 올렸을까?) 발아래 펼쳐진 카르스트 지형의 절경. 땀 범벅이 된 채 드론을 날렸다. 이 뷰 하나로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데이터가 없는 탓에 길을 잃고 헤매다 도착한 곳은 예정에 없던 '블루라군 3(시크릿 라군)'. 오히려 좋아. 사람이 적고 물이 깊었다. 자신만만하게 점프대에 섰다. 머리엔 고프로를 야무지게 맸다. "간다!" 호쾌하게 몸을 던져 입수하는 순간. 툭- 가벼워진 머리의 감각.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내 머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고프로가 사라졌다.


"으악!!!!!" 비명이 절로 나왔다. 카메라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 안의 SD카드. 거기엔 내 세계여행의 모든 기록이, 그동안의 추억들이 담겨 있었다. 백업? 용량이 부족해서 아직 못 했다. 그게 저 석회질 섞인 뿌연 물바닥에 가라앉은 것이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물속을 뒤졌다. 하지만 부력 때문에 몸은 자꾸 뜨고, 앞은 보이지 않았다. 덴마크, 프랑스, 한국... 국적 불명의 수색대가 결성되어 도와주었지만, 2시간이 지나도 고프로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반쯤 포기 상태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때,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덴마크 아저씨, 이반(Ivan)이 내게 다가왔다.


"Hey, listen. 아까 네가 뛰었던 그 자리로 다시 올라가 봐."

"네? 다시요?"

"그래. 그리고 아까랑 똑같은 자세, 똑같은 각도로 다시 뛰어봐. 내가 네 입수 위치와 궤적을 보고 잠수할게."


그는 단순한 구조자가 아니었다. 그는 물리학자처럼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프대에 섰다. 그리고 고프로가 날아갔던 그 순간을 복기하며 몸을 던졌다. 풍덩! 내가 물살을 가르자마자, 이반 아저씨가 내 입수 지점을 눈으로 쫓더니 망설임 없이 깊게 잠수해 들어갔다.


1초, 2초, 10초... 숨이 막힐 듯한 정적. 잠시 후, 물 위로 그가 솟구쳤다. 그의 왼쪽 손엔 자신의 고프로가, 그리고 오른쪽 손엔... 내 고프로 헤드 스트랩이 들려 있었다.


"Oh my god!!!!!" 그 순간 블루라군 3에 있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물속에서 기쁨의 댄스를 추며 그를 껴안았다.

"Thank you! Thank you so much! 뭐든지 말해요! 다 사드릴게요!"

그가 쿨하게 웃으며 딱 한마디 했다.

"Just one beer." (맥주 한 잔이면 돼.)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맥주와, 허기진 배를 채울 신라면을 대접했다. 물놀이 후, 죽다 살아나서 먹는 신라면의 맛. 그건 단순한 라면이 아니라 '인류애의 맛'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숙소(파어웨이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방전된 상태로 도미토리 문을 열었는데, 1층 침대 구석에서 희미한 신음이 들렸다. 한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노트북을 붙잡고 끙끙대고 있었다. 여행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처량하고 위태로운 몰골. 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무심코 물었다.

"How are you?"

그가 고개를 들었다. 깊은 한숨이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Not good... really not good."

사연인즉슨 총체적 난국이었다. 심각한 배탈이 났는데, 설상가상으로 가져온 신용카드가 먹통이 됐단다.

현금은 떨어져 가는데 카드는 안 되고, 배는 아파서 꼼짝도 못 하고.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노트북으로 은행 서버와 씨름하던 중이었다.


남 일 같지 않았다. 나도 오늘 고프로 때문에 지옥을 갔다 오지 않았던가. 나는 오지랖을 발휘해 그를 도왔다. 다행히 내 도움(혹은 조언)으로 급한 불을 끈 그는, 안경 너머로 안도의 눈빛을 보냈다.역시나 한국인이었고 이름은 지훈. 얘기를 나눠보니 이 친구, 겉보기엔 환자였지만 말하는 게 보통이 아니었다.


"몸도 좀 괜찮아진 것 같은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한국인은 밥심이지." 나는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향한 곳은 '꽃보다 청춘'에 나왔다는 핫팟(샤브샤브) 집. 메뉴판을 보던 지훈이가 눈을 반짝였다.

"형님, 삼겹살이 인당 4만 9천 낍(약 3,800원)이네요? 야채 무한리필에 이 가격이면 가성비가..."

방금 전까지 죽어가던 사람 맞나? 그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합리적인 소비를 분석했다.


지글거리는 불판 위, 삼겹살이 익어갔다. 나는 오늘 겪은 '몸으로 때운' 무모한 고프로 구조담을 떠들었고, 지훈이는 "거기선 입수 각도가 중요했네요"라며 '머리로 하는' 분석을 내놓았다. 성향은 정반대였지만, 이상하게 대화가 잘 통했다. 우리는 배가 터지도록 먹고 둘이 합쳐 고작 15만 낍(약 1만 원)을 냈다.


"형님, 내일은 저랑 같이 움직이시죠. 제가 안전하고 효율적인 루트 짰습니다."

지훈이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오늘 혼자 죽을 고비를 넘긴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은 네 말 듣자."


고프로도 찾았고, 든든한 파트너도 생겼다. 방비엥의 밤이, 어제보다 훨씬 아늑하게 느껴졌다. 만약 그가 배탈이 나지 않았다면, 내 "How are you"가 없었다면, 우리는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훗날 내 여행의 절반을 함께하게 될 이 '제갈공명'과의 인연은, 그렇게 삼겹살 냄새 속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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