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앙프라방의 에메랄드빛 위로와 스토커들

우연이 세 번 겹치면 필연이라던데, 남자 둘은 좀 곤란하다

by 예한


어제 그 지옥의 슬리핑 버스에 구겨져 있던 내 몸은, 오늘 아침 스쿠터 위에서 비로소 펴졌다. 루앙프라방 시내에서 꽝시 폭포까지 30km. 낡은 스쿠터 엔진 소리가 경쾌했다. 헬멧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이 어제의 땀 냄새와 분노를 날려 보냈다. 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라오스의 시골 풍경은 그림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초록이 뚝뚝 묻어날 것 같은 산과 구름. '그래, 이 맛에 개고생하면서 여행하는 거지.' 나는 엑셀을 더 세게 당겼다. 어제 납치범에게서 도망칠 때 흘렸던 식은땀이, 오늘은 시원한 바람이 되어 등줄기를 식혔다.


도착한 꽝시 폭포 입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시킨 볶음밥 위에는 노란 계란 지단이 예쁘게 올라가 있었다. 물론, 지단 값은 따로 받는다. 철저한 자본주의 맛이었지만 꿀맛이었다.


전기 카트를 타고 숲길을 오르니 뜬금없이 반달곰들이 나를 반겼다. 보호센터의 곰들은 팔자 좋게 누워 있었다. 녀석들의 뼈 굵기를 보니, 산에서 마주치면 죽은 척이고 뭐고 기도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들을 지나쳐 조금 더 오르자, 눈을 의심케 하는 풍경이 나타났다. 물이, 에메랄드였다.


누가 숲속에 거대한 입욕제를 풀어놓은 것 같았다. 비현실적인 물색에 홀린 듯 옷을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이 정수리까지 차오르는 순간, 어제의 억울함, 30만 낍의 바가지, 사라진 숙소 사장에 대한 분노가 씻겨 내려갔다. 자연이 주는 위로는 말보다 강력했다. 나는 그 자연 수영장에서 어린애처럼 첨벙거렸다.


다음 날 새벽 5시. 루앙프라방의 아침은 기도로 시작된다. 잠결에 호객꾼 아주머니에게 홀려 산 2만 낍짜리 찰밥 바구니를 무릎에 놓고 거리에 앉았다. 주황색 가사를 두른 승려들의 맨발 행렬이 안개 속에서 걸어 나왔다. 나이 지긋한 노승부터 아직 앳된 동자승까지. 그들의 발우(밥그릇)에 내 몫의 밥과 과자를 조금씩 떼어 넣었다.


그런데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그 다음 장면이었다. 시민들에게 받은 음식을, 승려들은 다시 길가에 앉은 가난한 아이들의 바구니에 말없이 덜어주고 있었다. 시민 → 승려 → 아이들. 음식은 고이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었다. 어제 나는 돈 몇 푼에 얼굴을 붉히고 사기꾼을 저주했는데, 이곳의 사람들은 가진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가슴 한구석은 묵직하게 데워졌다.


경건한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와 재정비를 마치고 나니, 속세의 욕망이 꿈틀거렸다. '마사지... 그리고 한식.' 구글 맵을 뒤져 평점이 좋은 마사지 샵(Saykhong Mixay)을 찾았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악력에 감탄하며 노곤하게 풀려 나오는데, 옆 가게 간판에 익숙한 글씨가 보였다. [김치볶음밥] 17일 만의 한식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붉은 양념이 밥알 하나하나에 코팅된 그 자태. 한 입 먹는 순간, 혀끝에서 고향의 종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진짜 종소리는 따로 있었다. 식당을 나서는데 툭툭 한 대가 지나가며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어! 형님!" 또 그 녀석들이었다. 국방색 'ROK Army' 티셔츠를 입은 한국 남자 둘. 생각해보니 어젯밤, 내가 분노의 러닝을 할 때 "화이팅!"을 외쳤던 목소리의 주인공도 이들이었다. 탁발 행렬에서도 스치듯 봤었다. 마사지 샵 앞에서도 마주쳤다. 이 넓은 루앙프라방에서 하루에 네 번을 마주친다고? 이쯤 되면 우연이 아니라 스토킹이거나, 전생에 빚을 진 채권자들이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야, 너네 나 따라다니냐? 이따 야시장에서 봐."


해 질 녘, 푸시산(Mount Phousi)에 올랐다. 328개의 계단을 오르니 메콩강과 칸강이 합류하는 루앙프라방 시내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일몰이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어제 만난 인연, 스위스 친구와 함께 야시장으로 향했다.


야시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월드컵 중계가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그 '코리안 아미' 동생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맥주병을 부딪치며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쳤다. 비록 경기는 졌지만, 낯선 타지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뭉쳐 소리 지르는 그 순간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어제는 혼자라는 외로움에 떨며 잠들었지만, 오늘은 에메랄드빛 폭포에 젖고, 따뜻한 밥을 나누고, 지독한 인연들과 웃으며 잠든다. 여행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옥 바로 옆 동네가 천국이라니 말이다.


다음 날 아침 7시. 알람 없이 눈이 떠졌다. 탁발 행렬을 보러 나가는 대신,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여행지에서의 아침 러닝은 내가 그 도시에 '살아있다'는 신고식과도 같다. 목적지는 어제 봐뒀던 남칸 강의 낡은 나무 다리.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삐걱거리는 그 다리 위를 달렸다. 발밑으로 흐르는 강물과 다리의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너낌 있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마주한 아침 햇살은, 어제 폭포에서 봤던 에메랄드빛과는 또 다른 따스함이었다. 루앙프라방이 내게 건네는 마지막 작별 인사 같았다.


체크아웃은 12시. 기차역 셔틀은 2시 반. 애매하게 남은 시간, 나는 주저 없이 어제 그곳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한 마사지 샵(Saykhong Mixay). "또 왔어?" 하는 눈빛의 직원에게 몸을 맡겼다. 단돈 8만 낍(약 6천 원). 한국 커피 한 잔 값으로 누리는 이 호사가 그리울 것 같았다.


개운한 몸으로 점심을 먹으러 향했다. 메뉴는 어제 그 질긴 인연의 '아미(Army) 브라더스'가 추천해 준 마파두부 식당.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음식이 늦었다. 11시 10분이 넘어가자 슬슬 초조해질 무렵, 식당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오는 두 남자. 국방색 티셔츠. 익숙한 실루엣. 또 그 녀석들이었다.

"어? 형님?!" "와... 너네 진짜 나한테 GPS 달아놨냐?"


밤거리 러닝 때 한 번, 탁발 현장에서 두 번, 마사지 샵 앞에서 세 번. 그리고 오늘, 그들이 추천해 준 식당에서 네 번째 만남이다. 우리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면 루앙프라방이 좁은 게 아니라 우리가 운명인 건데?" 결국 우리는 마파두부를 사이에 두고 한참을 떠들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인연이란 참 신기하다. 한국이었다면 스쳐 지나갔을 타인들이, 이곳에선 밥 한 끼에 10년 지기 친구처럼 가까워진다.


그들과 진짜 작별을(아마도?) 고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이상하게 배낭이 더 무거워진 기분이다. 기념품을 산 것도 아닌데. 아마도 며칠간 쌓인 추억의 무게가 아닐까, 라고 포장해 보지만 현실은 그냥 땀에 젖은 옷 무게일 것이다. "하아, 왜 이렇게 짐이 커지냐고." 혼잣말을 뱉으며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도착한 루앙프라방 기차역은 낯설었다. '중국 자본의 향기'가 진하게 나는, 으리으리하고 거대한 건물. 공항 검색대 뺨치는 보안 검색을 통과해 들어갔지만,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식당은커녕 물 한 병 살 곳도 없는 기묘한 공간. 오후 4시 16분 기차. 우리는 3시 56분부터 줄을 섰다. 티켓 번호에 맞춰 한 줄에 5명씩 앉는 구조. 기차가 출발하자 창밖으로 일몰이 지기 시작했다.


버스로 5시간 넘게 걸리던 구불구불한 산길을, 기차는 터널을 뚫고 1시간 30분 만에 주파한다. 편리하지만 어쩐지 아쉬웠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느꼈던 그 날것의 라오스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보며 나는 루앙프라방과 이별했다. 고즈넉한 사원의 도시여, 안녕.


방비엥에 도착하니 공기부터 달랐다. 조금 더 습하고, 조금 더 들뜬 냄새. 예약해 둔 '파어웨이 게스트하우스(Faraway Guesthouse)'에 도착했다. 수영장이 딸린 도미토리. 문을 열자마자 아기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었다. "그래, 오늘부터 여기가 우리 집이다."


짐을 풀고 2층 침대에서 내려다본 수영장 뷰는 꽤 근사했다. 3박 4일. 루앙프라방이 '치유'였다면, 이곳 방비엥은 '놀이'가 될 것이다. 내일부턴 본격적으로 이 도시를 즐겨볼 생각이다. 물론, 그 질긴 인연의 아미 브라더스를 여기서 또 만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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