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슬리핑 버스와 호날두, 그리고 카우치서핑

호날두가 맺어준 인연과 소파 위에서의 하룻밤

by 예한

"Chicken? Okay. One chicken." 가볍게 국수나 한 그릇 때우려던 계획은, 테이블 위에 백숙만 한 닭 한 마리가 통째로 올라오는 순간 박살 났다. 맞은편에 앉은 포르투갈 털보, 주앙(João)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가벼운 식사'야? 한국인은 원래 이렇게 먹어?" "아니, 이건 오해라고..."


우리는 말도 안 통하는 라오스 시골 식당에서 거대한 닭을 뜯었다. 배는 불렀지만, 계산서가 나오자 식은땀이 흘렀다. 30만 낍. 아뿔싸, 국경 넘느라 정신이 없어 환전을 못 했다. 내 지갑엔 달러뿐이었다. 주앙이 씩 웃으며 지갑을 열었다. "내가 낼게. 나중에 줘." 그가 15만 낍을 내밀었다. 순간 자존심이 발동했다. 납치범에게서 도망친 내가, 밥값 때문에 빚을 질 수는 없었다. "기다려. 한국인은 은혜를 2배로 갚는 민족이야. 그리고 우린 빚지고는 못 살아." 나는 배낭 깊숙한 곳, 비상금 주머니를 뒤져 어머니가 쥐여주셨던 10유로 지폐 한 장을 꺼냈다. 환율을 따져보니 얼추 맞았다. "자, 유로야. 이걸로 퉁치자."


주앙은 유로를 받아 들고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Crazy Korean! 여기서 유로를 쓰는 놈은 처음 봐!" 나는 그 길로 식당 한복판에서 점프했다. 그리고 착지와 동시에 양팔을 쫙 펼치며 외쳤다. "Siuuuuu!!!" 호날두의 고향 사람 앞에서 시전한 호날두 세레머니. 주앙은 배를 잡고 넘어갔다. "Fucking crazy man! 너 진짜 돌아이구나?" 우리는 그 '미친 짓' 하나로 국적을 초월한 형제가 되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어렸다.


하지만 유쾌함은 거기까지였다. 진짜 지옥은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티켓엔 분명 좌석 번호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1등으로 줄을 섰다. 하지만 검표원은 우리 표의 좌석 번호를 볼펜으로 찍찍 그어버리더니, 맨 뒤로 손짓했다. "Go back. Last seat." "뭐? 왜? 우리 표 있잖아!" 그는 들은 척도 안 하고 현지인들을 앞자리에 태웠다.


항의할 틈도 없이 우리는 버스 맨 뒷좌석, 아니 '짐칸 같은 침대'에 처박혔다. 원래 한 명이 누워서 가는 자리에, 남자 넷을 짐짝처럼 구겨 넣었다. 다리를 펼 수도, 허리를 펼 수도 없었다. 옆 사람의 땀 냄새와 내 발 냄새가 섞이는 그 좁은 공간에서 5시간을 버텨야 했다. '이게 여행이지... 그래, 이게 진짜 여행이야...' 나는 주문을 외우듯 되뇌며, 척추가 반으로 접히는 고통 속에 억지로 잠을 청했다.


루앙프라방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영혼까지 털린 상태였다. 비몽사몽 내리자마자 툭툭 기사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10만 낍! 10만 낍!" 시세를 알아볼 기력도 없었다. 그냥 달라는 대로 쥐여주고 탔다. 나중에 알고 보니 5배 바가지였다. 얼굴에 '호구'라고 써 붙이고 다닌 꼴이었다.


그래도 숙소만 가면 쉴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버텼다. 예약한 호스텔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카운터엔 앳된 베트남 청년이 앉아 있었다. "체크인. 김예한." 청년은 장부를 뒤적이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음... No room." "무슨 소리야? 예약했어. 여기 확정 메일도 있다고."

"Boss gone. Other guest take room. Finish." 사장이라는 작자는 내가 늦게 오자 방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리고 퇴근했다는 것이다. "그럼 사장한테 전화해." 청년은 울상이었다.

"Me... today first day. No phone number." 오늘 첫 출근이라 사장 번호도 모른단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납치 미수, 버스 지옥, 바가지요금, 그리고 숙소 증발. 보통 사람이라면 주저앉아 울었겠지만, 나는 달랐다. "Okay. Shower first." 나는 벙찐 직원을 뒤로하고 공용 샤워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틀고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젖은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달리러.


루앙프라방의 밤거리를 미친 듯이 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을 때까지. 땀과 함께 분노가 배출되자, 차라리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까짓것 텐트 치고 자면 되지.'


다시 호스텔 로비로 돌아와 땀에 젖은 채 이 글을 쓴다. 방은 없다. 갈 곳도 없다. 내 옆엔 배낭 하나와 텐트뿐. 하지만 이상하게 두렵지 않다. 오늘 하루, 납치범도 따돌리고 호날두 세레머니도 했으니까. 길바닥이 내 침대라면, 별빛이 내 이불이겠지. 텐트를 치고 자야겠다 하고 꺼내려다가.....


결국 텐트 폴대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아무리 사장이 괘씸해도, 로비 한복판에 텐트를 치면 죄 없는 다른 투숙객들이 놀랄 게 뻔했다. 나는 마지막 남은 양심을 발휘해 공용 소파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래, 이게 진정한 카우치 서핑이지. 공짜 잠 개이득.' 자기합리화의 대가답게, 나는 1분 만에 기절했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아고다 앱을 켰다. 환불 신청 버튼을 누르며 복수의 서막을 알리고, 짐을 챙겨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다신 오나 봐라." 어차피 라오스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검색해 보니 '꽝시 폭포'가 레전드라는데, 솔직히 기대는 안 됐다. 세계 어디를 가나 폭포가 다 거기서 거기지. 물 떨어지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나는 심드렁한 마음으로 근처의 다른 숙소, 조금 더 비싼 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숙소를 옮기자마자 세계관이 바뀌었다. 테라스에 앉아 조식을 먹는데, 발밑으로 치즈 색깔 고양이들이 "야옹" 하며 다리에 몸을 비볐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펼쳐진 리버뷰가 기가 막혔다. 어제 그 지옥 같은 로비와는 차원이 다른 풍경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감격스러운 건, '빨래를 널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며칠 동안 배낭 속에서 썩어가던 땀 젖은 옷들을 햇볕 아래 널어놓으니, 이제야 숨통이 트였다.


가격 차이를 확인해 보니 고작 2,000원. 어젯밤 그 생고생과 분노의 값이 겨우 2,000원이라니.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젠장, 진작 여기로 올걸."


지옥의 버스와 노숙 끝에 찾은, 고작 2,000원짜리 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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