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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 Dec 22. 2021

후진국에 사는 이유

나의 일상이 너의 휴가

“통화가 왜 이리 끊겨?”
“죄송해요. 후진국에 살아서 그래요.”




꼭 Political Correctness에 연연하지 않더라도 '후진국'이란 표현은 모멸적인 느낌이 들기에 일상에서 사용하지는 않지만 가끔 한국에 있는 선후배 또는 친구들과 인터넷 전화로 통화할 때 자꾸 끊기는 경우, 웃자고 종종 위와 같이 대답하곤 한다. 어쨋든 우리집 인터넷은 바람만 조금 불어도, 번개가 몇 번만 쳐도 먹통이 되곤하기 때문에 한국과 비교하자면 한숨이 나오는 수준이다. 사실 고작 인터넷이 느리고 자주 끊긴다는 이유만으로 '후진국에 산다'고 말하게 된 것은 아니다. 먹고 사느라 서로 바쁜 와중에 멀리 사는 친구나 선후배와 통화할 일은 무슨 큰 일이라도 나야만 생기는 것인데 작년에 내가 사는 나라에서 코로나로 사망한 시신을 묻을 곳이 없어서 임시 매장을 한다는 뉴스가 연일 한국에 보도되고 이어서 BLM으로부터 촉발된 약탈, 이후 한국인을 상대로한 총기 난사 등의 소식이 계속 한국 언론에 보도 되면서 뜻하지 않게 지인들로부터 안부 전화를 받게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 통화 중 인터넷 전화 품질까지 떨어지니 그 당시 씩씩하게 코로나를 이겨내며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던 한국의 지인들에게 딱히 핑계될 만한 말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명실상부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 대한 서로간 은근한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천조국으로 불리우는 미국의 동부에 위치한 펜실베니아 (Pennsylvania)주에 살고 있다. 펜실베니아주가 남한의 영토보다 크기 때문에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나라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땅은 작지만 대한민국이 인구 면에서는 펜실베니아 주에 비해 거의 네 배가 많다. 한국보다 약 네 배가 적은 펜실베니아주의 인구 중 거의 1/5이 동서 끝에 위치한 두 도시인 필라델피아 (Philadelphia)와 피츠버그 (Pittsburgh)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펜실베니아주의 인구 밀도, 특히 suburb 지역이나 농촌 지역의 인구 밀도는 한국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낮은 편이다. 따라서 한국과 같은 통신망이 깔려 있지도 않고 운전을 하다보면 스마트폰의 무선 통신 서비스조차 끊기기 일수이다. 심지어 전에 살던 집에서는 실내에서조차 휴대전화가 먹통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의 지인들이 후진국이라고 부르는 이 환경이 내가 이곳에서 살고 있는 이유이다.




코로나 이후 한국에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캠핑에 관심을 가지고, 등산이나 트래킹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많은 중년 남성들 시청자들로 인해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TV 프로그램이 장수 인기 프로그램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규정하게 만드는 빠른 통신망, 크고 복잡한 도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다양한 서비스들, 언제나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히게 되는 일상으로부터 도망쳐 자기를 돌아보고, 주위의 환경이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들을 느끼고, 가족 또는 친구 아니면 혼자만의 시간을 여유있게 보내고 싶은 것이 아닐까? 내가 이곳에 사는 이유를 가장 쉽게 설명하자면 나는 이곳에서 그 모든 것들을 일상으로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집 옆에는 말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는 목장이 있고 또 계곡 옆으로 이어지는 트레일이 있다. 잠깐 운전을 하면 카약을 타거나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큰 호수에 도착하고 또 자연속에서 캠핑을 즐길 수 있는 주립공원이 있다. 집 근처에는 여러개의 공원이 있는데 각 공원마다 천연잔디가 깔린 풋볼장, 농구장, 야구장이 있고 대부분 농구장, 테니스장과 같은 시설도 갖추고 있다. 어떤 공원은 비치 발리볼을 할 수 있는 모래 코트나 스케이트 보드장까지 갖추고 있다. 내가 회사로 출근하는 20여분 남짓한 여정 중 나는 어떤 신호도 대기할 필요가 없는데 거쳐야 하는 몇번의 교차로도 대부분 신호등이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대부분의 길은 local길이라 나무들, 잔디밭, 계곡을 끼고 도는 길이다. 전에 차를 바꾸기 전에는 convertible을 운전해서 날씨가 좋은 날이면 맑은 공기와 따뜻한 햇볕을 만끽하며 출퇴근을 했다. 물론 위에 언급한 모든 장소에서 내가 항상 내 스마트폰의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2021년 여름 어느 퇴근길 동네 초입에 들어서며 하늘이 아름다워 잠시 차를 세우고 찍은 사진


주문하면 무조건 다음날 도착해야 하는 택배, 어디서나 주문 가능한 배달음식, 집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접근 가능한 수많은 서비스들, 24시간 열려 있는 식당과 술집,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운행하는 대중교통과 대리운전 등이 선진국의 한 척도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는 곳은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내가 사는 이곳은 너무나 느려서 때론 멈춰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계절의 변화를 빼면 지역에 특별한 이벤트 같은 것이 있지도 않다. 그래서 가끔 동네 이벤트 같은 것이 있을 때면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다가 나왔을까 생각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진심으로 그 시간을 즐기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행사 기획의 달인급인 한국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별볼 일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가 가진 것들을 즐기는 것이 바로 '소확행' 아닐까?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미국 독립 기념일을 축하하는 불꽃놀이 행사 때 올해는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덕분에 큰 무지개를 볼 수  있어서 모두가 즐거워 했다.


미국은 거대한 나라다. 펜실베니아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에서 큰 도시를 제외하고는 한국처럼 어디서나 사람이 붐비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물론 휴가철 유명 관광지는 붐비긴 하지만 그래도 그 기간을 조금만 피하기만 해도 훨씬 나은 여유를 기대할 수 있다. 나는 펜실베니아주의 동쪽에 살고 있기 때문에 대서양 쪽 해변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가장 가까운 곳은 편도 약 2시간의 운전만 하면 다녀올 수 있기 때문에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종종 가족들과 함께 바닷가를 찾곤한다. 미국 동부 바닷물은 한국의 동해나 남해 같지는 않고 갯벌이 없는 서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물이 깊지 않아서 아이들과 놀기에 좋다. 그리고 역시 좋은 점은 사람과 차에 치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건 산이던 바다던 강이던 호수던 어디를 가던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2021년 여름 동해 바닷가


미국에 살다 보면 왜 이들이 스포츠와 셀럽들에 이리 열광하는지 조금은 알게 된다. 아마도 단조로운 일상에 조금의 역동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 딱히 할게 없어서 스포츠에만 열광하는 거라고 말하는 내 지인들 피셜 "후진국"에서는 전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 세 개 중 두 개를 대표하는 리그를 가지고 있다. 미국 최고의 스포츠는 넘사벽으로 당연히 football이지만 그 뒤를 이어 농구 리그인 NBA와 야구 리그인 MLB 역시 엄청난 인기와 규모를 자랑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리그이다. (미국의 프로 축구 리그인 MSL도 훌륭한 리그이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큰 주목을 받는 스포츠는 아니다) 대한민국은 야구가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인 전 세계에서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나 역시 야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지역 연고팀을 응원하고 있는데 세계 최고의 야구 리그를 직관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이곳에 사는 이유는 아니지만 이곳에 살면서 부가적으로 얻을 수 있는 기쁨 중 하나이다.


2021년 직관한 지역 연고팀의 게임




내가 이곳에 사는 이유는 앞에 언급한 것들 외에도 아이들의 교육, 덜 치열한 경쟁, 워라밸 등이 있다. 이것들과 관련하여서도 앞으로 글을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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