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목에 '미국 회사'라고 쓰는 것은 너무 과장인 것 같지만 어그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음을 양해 부탁 드린다. 그냥 미국에 있는 "우리" 회사에 다니면서 느낀 좋은 점이 더 정확할 테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다른 직장 내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의도라는 것을 누군가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5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라떼 이야기하면 진짜 꼰대라고 하지만 라떼는 진짜 2분 늦어서 시말서 쓰는 사람도 보았다. 직장 선배는 한국에서 해고가 정말 어려운데 실제 소송까지 갈 경우 근태를 문제 삼는 것이 사측에 제일 쉬운 방법이라며 근태 관리는 사회생활의 기본이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어느 곳이나 근태는 직장 생활의 기본이기 때문에 무단으로 지각을 하거나 결근을 할 경우 이곳에서도 가차 없이 해고가 되기 마련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엔지니어라는 직종에서 오는 어드밴티지도 있는데 우리 회사의 위치가 상당히 외곽이기 때문에 엔지니어들을 채용하는데 애를 먹을 때도 있고 그래서 가능한 조금 더 유연한 근무 분위기를 제공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 걸 떠나서도 유럽처럼 유연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 회사의 경우 한국에 비해 출퇴근 시간이 유연하기 때문에 아침에 출근하다 배가 아파서 잠시 화장실에 들리는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마음 졸이며 팀장에게 문자 메세지를 보내는 일은 없다. 물론 나이가 지긋한 곧 은퇴를 앞둔 분들은 늘 반듯한 옷을 입고 아침 일찍 정시에 출근하는 모습을 보지만 나를 포함해 나보다 훨씬 어린 직원들은 사실 언제 출근할지 알 수가 없어서 아침 9시에 미팅 잡는 것도 많이 망설이는 편이다. 내 경우에도 오늘은 9시에 근무를 시작했는데 이번주에 하루 8시간 이상 일한 날이 몇 번 있으므로 퇴근은 비슷한 시간에 할 예정이다. (사실 재택근무 중이라 업무 종료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할 때 정시에 카드를 찍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한 스트레스였는데 야근과 회식이 잦다 보니 생각보다 이 스트레스가 컸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아침에 조금 돌아가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가는 것이 10 - 20분 늦게 사무실에 도착하더라도 개인의 행복감과 업무 효율을 상당히 높여 주는 것 같다.
"갑자기 개가 아파서 지금 집에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는 서양권의 일반적인 문화인데 미국의 경우에는 가족 구성원의 하나로 인정되는 반려견이 아파서 출근을 못하거나 근무 시간을 조정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집에 개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데 반드시 출근을 해야 하는 경우 개를 데리고 출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정도니 가족과 관련된 일은 당연히 최우선 순위로 인정되는 분위기이다. 나 역시도 근무 중 "와이프가 아프다네. 나 좀 가봐야겠어"라든가 "오늘 와이프 대신 내가 애를 픽업해야 되니까 나 먼저 가"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어리다 보니 여러 가지 일이 생기는 편인데 이런 부분을 아내와 나누어 담당할 수 있으니 좋다. 작년에 개를 입양할 때는 갑자기 분양하는 사람과 연락이 닿아서 근무하다 말고 개를 보러 가야 했었는데 그때는 내 보스가 현 부사장이어서 "개 보러 가야 돼서 일찍 가봐야겠어"라고 메세지를 보낸 때가 한 오후 2시쯤 되었던 것 같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엄청 중요한 업무가 있지 않는 한 그 정도는 용인되는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들 학교의 작은 행사에 참여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싶다. 또한, 가정일로 내 연차를 쓰면서도 눈치를 보았던 (라떼는...) 때와 비교하면 가장으로서의 자존감이 훨씬 높아지는 건 두말할 것이 없다.
"자꾸 뭘 승인해 달라는 거야?"
라떼는 보고서를 결재판에 넣어서 들고 갈 때였다. 보고서의 서식이나 오타만으로도 신나게 까일 수 있었고 실제 보고서 때문에 밤을 새우다시피 하기도 했었다. 꼭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대부분 결재가 필요했고 결재 라인은 복잡했었다. 덕분에 미국에서는 문서 작성에 능하다는 칭찬을 여러 번 받았고 누군가는 한국의 교육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다만 미국에서의 회사 생활 초반에는 엄청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많은 일에 특별한 결재 프로세스가 없다 보니 일을 진행해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전혀 성과를 못 낸 적도 있다. 특히 경비 사용의 경우 한국에서는 반드시 승인 후 절차에 따라 사용해야 했기에 작은 부품을 사는 경우에도 계속 보스에게 찾아가서 물어보니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꽤 깊었던 예전 보스가 아예 금액을 특정 지어주며 그 안에서는 너의 재량껏 집행하고 사후 보고만 해달라고 알려주어 꽤나 고마웠던 적이 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어 (또는 내가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어) 초반에는 뭘 자꾸 approve 해 달라거냐며 짜증 섞인 질문을 받기도 했었다.
한 성질 하다 보니 한국에서 결재가 반려됐을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었고 또 상급자와 많이 언쟁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필요하지 않았던 프로세스이고 인력, 시간, 경비의 낭비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운이 좋게도) 내가 만난 몇 명의 상사는 어렵게 승인을 해주었지만 한 번 승인을 하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까지 본인이 take 했었다. 그러나 또 승인 절차가 누군가의 책임 소지를 묻기 위해도 사용되기도 했었고 그래서 결재를 피해 도망 다니는 상사를 모신(?)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 회사에서는 대부분의 승인은 구두나 이메일상으로 받게 되는데 (사실은 승인인라기 보다는 동의에 가까움) 오히려 그 과정에서 충분한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좋은 것 같다. 승인을 받지 못하더라도 '반려'라는 단어 뒤에 있는 이유를 찾기 위해 사수의 눈치를 보며 물어보지 않아도 되니 이 역시 엄청난 스트레스 경감 요인이 된다.
National Pizza Day
우리 회사의 경우 많은 이벤트가 있는데 지난 2월 9일은 Nationa Pizza Day여서 피자를 먹어야 한다고 피자를 간식으로 먹는 식이다. 코로나 전에는 진짜 이런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거의 격주로 있다시피 했었던 것 같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벤트는 한 여름에 아이스크림 트럭을 부르는 것인데 그때는 그냥 아이가 된 것 마냥 기다려지고 신이 나곤 한다.
아이스크림 트럭
어쩌면 우리가 영화나 미드에서 보는 사무실 분위기 또는 꿈꾸는 미국 회사의 모습이 동료들과 이런 이벤트를 즐기는 여유로운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 같지는 않다. 제조업 특성상 내 동료들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시커먼 아재들이고 그저 "먹고 놀자"하며 좀 더 긴 휴식 시간을 즐기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래도 새로운 경험이고 또 팍팍한 직장 생활에서 약간의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는 시간들이다. 또 가족들과 함께하는 파티도 있고 즐기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색다르고 재미있는 이벤트들이 많다. 예를 들어 회사 파티에 부부나 커플이 멋지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와서 밴드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것 같은 것은 나와 와이프는 도저히 엄두도 못 낼 것들인데 그래도 그저 파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을 느낄 수 있으니까.
대표이사 주차구역
좁아터진 땅덩어리에서 전 직원을 수용하지도 못하는 주차장 자리에 자리에 차 떼고 포 떼는 것처럼 임원 자리, 방문객 자리, 거래처 자리 등등 다 떼고 나면 결국 매일 아침 선착순인데 그나마도 교대 근무 등으로 일찍 오는 직원들 빼면 남는 자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차로 가면 20분이면 갈 거리를 버스 타고 1시간을 가던지 아니면 주차할 자리 찾아 회사 주위를 매일 몇 바퀴씩 돌던지의 선택인데 이러다가 퇴근해서 아파트에서 똑같은 짓을 매일 반복할라치면 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고 왜 주차 때문에 한국에서 살인이 나는지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다. 일단 미국의 경우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이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심 내부가 아닌 이상 전면 주차가 가능하고 문콕 걱정이 필요 없는 널널한 주차장을 대부분의 건물이 가지고 있다. 나 역시도 내가 늘 주차하는 자리 양 옆에 다른 차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또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자동차 앞유리에 자기 전화번호를 적어 놓고 혹여 전화가 올까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일이 이곳에서는 필요 없고 또 어딜 가던지 주차장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되고 설령 주말이라도 주차장 몇 바퀴를 뱅글뱅글 도는 일이 없는 삶은 생각보다 많이 일상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것 같다. (주말에 우리 동네 코스트코는 제외) 또한 출퇴근 시간에 교통 체증으로부터도 자유롭기 때문에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 이 단조로움이 매우 만족스러운 편이다.
다음 편은 '미국 회사에 다니면서 느낀 나쁜 점 다섯'이 될 예정이다. 말하자면 나쁜 점 100개도 되겠지만 일단 가장 뭣 같은 점 다섯 가지만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