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 좋은 점들에 이어서
어차피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의 좋은 점만 바라보면서 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나 사실은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이 더 잘 보이는 게 사람의 심리일지도 모르겠다. 나쁜 점을 나열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겠으나 그중 다섯 가지만 추려보았다. 대부분 문화나 법률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들이지만 게 중에는 꼭 고쳐져야만 할 것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쉬운 해고
영화에서 아침에 출근했는데 '당신 해고야'하는 상사의 말 한마디와 함께 작은 상자에 짐 싸들고 나오는 장면을 흔히 봤을 텐데 실생활에서 아주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종종 경험을 했던 일이다. 아침에 분명 출근해서 농담도 하고 했는데 잠시 후 안 보이고 갑자기 그 사람의 이메일이 블락되었다는 이메일을 받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다. 우리 주는 피고용인을 해고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이유가 필요 없기 때문에 쌓여왔던 갈등들이 폭발하면 (특히 당신의 보스가) 계약 해지로까지 일을 키울 수 있는 것이 미국 회사이다. 한국은 법적으로 해고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구조이고 문화적으로도 어지간하면 직장 상사와 극한까지 치닫는 경우는 많지 않아 회사가 망하지 않는 이상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보지는 못했다. (회사가 망하는 걸 직접 경험한 적이 있지만서도...) 그러나 이곳에서는 팬데믹이 시작할 때쯤 대량 해고가 있었고 락다운으로 인해 이별 인사조차 못하고 많은 동료들과 이별을 해야만 했었다.
개인주의 성향
사실 이런 부분이 좋아 한국을 떠나 이곳으로 이주한 것이지만 또 모순적이게도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했었던 나는 자주 동료들의 너무 극단적인 (내 기준으로...) 개인주의 성향으로 인해 힘들어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지역적인 성향도 강한듯한데 북동부 지역의 사람들이 까칠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도 들었다. 아무튼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또 아주 분명한 선을 긋고 직장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형님, 동생 하던 동료들을 생각하면 정말 멀게만 느껴질 때도 있다. 이에 반해 우리 회사 남미 지사의 동료들은 몇 번만 만나도 금방 'Hey amigo'하며 쉽게 다가올 때가 많다. 단지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조직의 문화도 개인주의 적이고 사생활을 굉장히 중시하는 편이다. 아주 예전에 팀동료가 계속 출근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사망했다는 부고를 듣게 되었다. 너무 충격적이라 몇 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았는데 얼마 후 HR에서 호출이 왔다. 왜 사망 원인을 궁금해하는지를 물었고 사무실내에서 해당 이야기를 업무 중에 하는 것이 적절치 않으며 더 이상 타인의 사생활에 접근하려 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었다. (지금은 나의 실수였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가슴속에 숨겨둔 인종 차별
한 회사에 오래 다닌 고인물이다 보니 그래도 동료들과 가까운 편이다. 그리고 원래 선을 넘는 이야기를 아무렇게 하는 성격이고 예민한 주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들의 속마음을 자신도 모르게 나에게 들어내는 경우가 있었고 그를 통해 그들이 실제로는 다른 인종이나 문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본의 아니게 알게 되었다. 한창 Black Lives Matter 운동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였다. 동료들과 뭐 대충 선을 넘지 않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돌아서려는데 그중 한 백인 동료가 혼잣말로 'xxxking bxxxx people'이라고 혼잣말하는 것을 듣고 말았다. 사실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내가 그곳에 서 있던 것을 예상 못했었는지 매우 당황해했었다. 사실 나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는데 대놓고 하는 인종차별은 별로 무섭지 않은 법이다. 은근한 차별이 더욱 화가 나는 일인데 다행히 적어도 지금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서는 약간 기분을 잡칠 정도의 기분 나쁨 정도는 경험을 했지만 HR에 끌고 갈 만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일단 내가 고인물이다 보니 기미가 보이면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고 또 어지간한 건 쿨하게 넘어갈 정도로 마음의 굳은살이 박혔다고나 할까. 그래도 누군가가 나를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가끔 인간을 비참하게 하는 법이다.
유리 천장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나이 많은 동양인 이민자 남자의 위치는 (다행히 동안인 아시안 유전자의 덕을 보고 있지만) 환영받을만한 입지는 아니다. 우리 회사는 일반 제조업이기 때문에 내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핸디캡을 안고 경쟁을 해야 하는 구조이다. 나는 한국에서 온 누구도 대체 불가능한 너드 프로그래머나 디자이너가 아니고 누구나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인 특유의 일머리와 성실함으로 어느 수준까지는 경쟁력 확보가 가능했다. 솔직히 한국에서 일하던 것의 50%만 했었을 때도 내 보스가 나에게 하루 휴가를 주며 쉬라고까지 했었다. 왜냐면 내가 거의 맨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떠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보다 많은 책임이 주어지면 그 경쟁력은 사라지게 된다. 아무리 내가 듣보잡 중소에 다니지만 그래도 여기서도 리더나 매니저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성실하고 능력도 있다. MBA 졸업한 사람도 있고 CPA도 있고 변호사도 있다. 그렇게 되면 플러스 알파가 요구된다. 그때가 되면 한계를 느끼며 유리 천장을 실감하게 되는데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뚫고 나갈 수가 없음을 느끼며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다. 작은 팀의 팀장인 지금의 자리가 (한국으로 치면 과장이나 차장 정도...?) 내가 이곳에서 오를 수 있는 최정점임을 느끼는 순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한국의 동료들이 부장이 되고 이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좌절감마저 들게 된다. 반면 이곳에서는 어느덧 나보다 한참 어리고 한참 뒤에 입사했던 동료들이 나와 같은 직급이 되거나 나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미국에서는 그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전원 특정 인종 남성으로 구성된 저 써클에 내가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한계이자 최대치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사는 사회는 관계이다. 회사를 구원할 만한 개인기가 있지 않는 이상 거기까지이다. 굉장히 능력이 있는 엔지니어로서 정년 퇴직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이를 먹어서도 기술의 최전선에 서있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직장이 곧 동아줄
모두가 알다시피 미국의 의료 체계는 확실히 비정상적이다. 아내가 얼마 전에 조직 검사를 했는데 보험이 있음에도 불고하고 한국돈으로 400만 원 가까운 돈이 청구되었다. 나도 정기적으로 주치의를 만나는데 만날 때마다 보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십 만원씩 청구되곤 한다. 물론 모든 것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지만 내 경우에는 그렇다. 왜 그런지는 나중에 따로 설명하려고 하는데 아무튼 만일 보험이 없다면 이것이 얼마가 될지는 전적으로 청구하는 의사에게 달려 있는 것 같다. 다행히 나는 보험 회사가 과다 청구 되는 일이 없도록 의사를 견제하기 때문에 그나마 방어막이 있는 것인데 만일 맘에 안 들어 회사를 때려치우는 순간 누가 하나 아프면 온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는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게 된다. 나같이 한국에 의료보험도 없는 사람은 정말 방법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한국이 더 쌀 것임) 거기에 우리 회사는 퇴직금이 따로 없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퇴직금 최소 몇천만 원이라도 들고 나와서 치킨집이라도 하겠지만 나는 사실 지금 회사에서 당장 잘리면 이번달 나가는 돈 메꾸기도 불가능할 것 같다. 물론 실업 수당이 있지만 그걸로 4인 가족이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에서 말한 손쉬운 해고와 유리 천장과 더불어 직장을 잃는 순간 플랜 B가 없다는 사실은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아 불안의 요소가 된다. 물론 한국에서도 직장을 잃는 것은 큰일이지만 나는 이곳에서는 늘 이민자이고 남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경쟁하고 있기에 지금 현재도 벌써 1년이 넘게 신중하게 이직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job security다. 적어도 나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