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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복 Aug 09. 2022

7세기의 원효대사를 21세기로 소환하자

<인류는 태양계에서 어떤 존재인가?>     

수억 년 전에 탄생한 현생 인류는 기원전 11,000년경부터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면서 문명의 발달이 이루어 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 발로 걷고 두 손을 사용하고 지혜를 발휘하여 도구를 만들고 자연을 활용하면서 만물의 영장답게 세대를 거듭하는 과정을 축척하여 삶의 의미를 승화시켜 나아가고 있다.

인간에게 지혜가 없었다면 사납고 강한 다른 동물들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까? 인간이 원시적 삶을 유지 했다면 지구 온난화와 환경 파괴로 인한 대 재양을 걱정하는 환경운동가들이 없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이미 오래전에 실기한 것으로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동안 인류가 쌓아 올린 외적 문화는 과히 기적에 가깝다. 우리 인류는 태양계에 존재하는 각종 물질이나 형태 등에 이름을 붙이고 기능과 작용을 이해하고 활용하며, 마치 인간들은 지구를 지배라도 한 것처럼 땅에 금을 긋고 끈이지 않는 영역다툼과 이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보다 더 파괴력이 강한 무기 개발경쟁이 한창이다. 이 뿐인가? 인간은 자신들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방안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구촌 곳곳에 형성된 거대한 도시, 도시를 휘황찬란하게 비추는 오색 불빛들, 77억 명이 의식주에 소비되는 자원들, 이로 인해 쌓이는 환경유해 물질들, 이 모든 것들을 지구가 감당하고 있다. 이제 지구 밖으로 눈을 돌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태양계의 다른 행성을 찾아 방문한다. 급기야 우주여행 시대를 개막했다고 자랑하고 이를 부러워하며 언제나 차례가 올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 흔한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겐 그림 속의 떡을 보는 것보다도 감흥이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이러한 소식을 접하지도 못했거나 소식을 접하고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은 오늘도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적 본능의 손발톱을 숨긴 채로 인간의 우월적 지위를 과시하듯이 인격을 제창하고 가치관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의 미래 가치를 끌어 사용하면서 그 해택을 보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몇%에 해당할까? 이 시간에도 인간이 저지른 무자비한 개발에 따라 악화된 기후와 싸워야하고 먹을 것이 없어 끼니를 굶어야 하며, 인권이 짓 발피고 있는 극과 극으로 차별화된 지구촌의 향연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인류의 외적 문화발전의 이면에 모든 인류 개개인의 인격과 가치를 존중하는 내적인 문화는 원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때이다.

또한, 2019년 말에 발발하여 아직도 진행 중인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9월 22일 기준 2억 3천만 여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고 4백 7십 2만 여명이 사망하였으며 지구촌 전 인류가 일률적인 안면 패션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동안 인류에 찾아온 전염병은 BC 1600년 경 천연두와 BC 431년의 아테네 괴질(용역ㆍ천연두 추정)로 병력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고, 1346년 유럽 전역에서 흑사병으로 7500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전 세계에서 2500만 명 이상이 사망 했고, 1957년 아시아 독감으로 미국에서만 7만 명, 전 세계 100만 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 동안 인류는 사스와 메르스, 에블라 바리어스. 조류 인플루엔자, 돼지독감 등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우리는 인지하고 있다 지구는 살아있는 생물체로 베일에 쌓여있다는 것을.... 우리 인류가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우주 시대를 개막했고 생명공학기술의 진전으로 수명을 늘리고 건강한 생활을 추구하고 있지만, 지구의 불꽃놀이에 화산 폭발피해, 세수 물에 홍수피해, 부채질에 태풍피해, 일광욕에 사막화 피해, 근육운동에 지진피해, 침과 콧물에 전염병 등 인간의 나약함을 실감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또한 가상하다.

정보ㆍ통신기술의 발달과 지식ㆍ정보화 시대를 넘어 제4차 산업혁명이라 부르는 미래 산업의 도래를 눈앞에 두고 있는 현세대 인류에도 위협이 되고 두려워하고 있는 지구의 자전활동에 고대 인류는 어떠했을까? 그들은 씨족이나 부족과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신화를 만들어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했으며, 일반 서민들은 하늘과 달, 별, 산과 바다, 그리고 바위와 나무, 심지어 동물 등을 신격화 하여 숭배하고 제를 지내며 위안을 삼았던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율법이 만들어지고 제물을 받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체벌을 당하거나 공동체의 적이 되어 퇴출되기도 했다. 이를 틈타 자신의 배를 채우거나 권력을 장악하여 만행을 부리는 일들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던 것은 미완의 미약한 인간들이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간절함에서 기인한 것일 것이다.     


<무속 신앙과 종교의 탄생>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로 알려진 신화로는 1281년에 편찬된 삼국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유사에 근거하여 단기(기원전) 2333년에 고대국가인 고조선을 건립했다는 단군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곰에서 여인으로 환생한 웅녀 사이에서 태여 난 단군왕검이 선민사상과 홍익인간의 이념을 바탕으로 국가를 건립했다는 내용이다. 이외에도 신당을 숭배하고, 점을 보고, 신 내림 굿을 하는 무속 신앙 등을 초자연적 존재와 초자연적 현상으로 받아들인 토속신앙이 뿌리내렸다. 이는 시대적으로 학문이나 정보를 접하지 못한 서민들이 궁핍한 삶과 재양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나 과학이 발전하고 정보화 시대인 현재도 유지되는 것은 보면 신통력이 있는 것인지 연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신이 없고 학문만 있는 것은 종교라고 칭할 수 없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와 유교 및 도교 등을 통칭하여 종교라고 한다. 이후 기독교, 천주교 등 다른 종교들도 전래되어 다(多) 종교의 국가이나 별도로 국교를 정하지 않았으며 모든 국민은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종교(宗敎)의 어원은 본래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불교용어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능가경에서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Siddhanta Desana를 종교로 한역한 용어였다. 한편, '신과 인간을 잇는다.'를 의미하는 religion을 종교로 해석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상신(示)을 모시고 제사하는 종갓집(宀)에 사용되는 '으뜸 종(宗)'에 '가르칠 교(敎)'를 사용한다. 즉 으뜸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위키 백과)

종교의 어원을 가진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석가모니(고타마 붓다)에 의해 인도에서 창시되어 삼국시대 4세기 내지 6세기(고구려 372년, 백제 384년, 신라 528년)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불교는 “원래 나의 것이 없으며 나의 것이 있으면 어느 곳에서나 번뇌(탐욕, 노기, 미혹 등)하게 된다.”이를 “망집(妄執)”이라 하고,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고 망집을 단절하면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이를 통해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른다.”는 이념으로 “형이상학적” 논리에는 개념치 않는다.

이러한 이념의 불교 사상이 우리나라에서 “호국 사상”과 “일심 사상”, “화쟁 사상”이라는 특유한 우리나라만의 사상이 전개되었다. 특히, 신라의 승려 원효대사는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설충장군”을 나았고 일반 중생과 함께 동고동락 하며 삼국통일의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하나인 마음에 돌아가는 “일심 사상”을 제창하고 일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베풀고 계를 지키며, 참는 마음을 수양하고 끊임없는 노력과 마음을 가라앉혀 항상 관찰하는 것을 실천덕목으로 삼았다. 또한, 깨끗하고 더러움, 참과 거짓, 너와 나 등 일제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한 쟁론을 회통하여 통불교를 이루는 “화쟁 사상”을 전개하였다. 이를 “원효 사상”이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불교는 토속 신앙과도 함께 어울려 민중 속으로 빠르게 전파되었고 불교의 문화뿐 아니라 민중들의 삶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불교가 현재는 중생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지난 5월 20일에 한국갤럽이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 의식>에 따르면, 불교인을 기준으로 “①요즘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에 “증가한다.”는 응답은 21%(2014년 50%, 1984년 66%), “감소하고 있다.”는 응답은 19% 이였으며, “②요즘 종교는 우리 사회에 도움 준다.”에 “도움 준다.”가 59%, “도움 주지 않는다.”가 41% 이고, “③나의 개인 생활에는 종교가 중요하다.”에 “중요하다.”가 62%(2014년 59%, 1984년 88%), “중요하지 않다.”는 38%로 응답하였다. 이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응답자가 불교인임을 감안할 때 불교에 대한 관심도가 급격하게 낮아지는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인류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혼돈의 시대>     

10년이 넘게 고용시장은 청년들에게 희망이 아닌 포기를 안겨 주고 있다. 청년 실업률은 10%대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고용률은 40%선에 멈춰있다. 지난 박근혜 정부는 고용률 70%을 국정과제로 제시 했으나 달성하지 못하였고 현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으로서 직무 1호가 일자리위원회를 발족하고 일자리 상황판을 집무실에 설치하는 것 이였으나 일자리 위원회의 실적도 상황판의 근황도 알 수 없다. “월래 너희 것이 없는 것이다. 너희 것이 있으면 고뇌하게 된다.”고 해야 될지?

취업에 성공한 청년들도 미래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인상되어 내 집 마련에 엄두도 내지 못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사태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역지침은 소상공인들의 영업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급기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소상공인분의 소식을 접하면서 죄인이 된듯하다. 전세 보증금을 찾아 종업원들의 임금을 지급하고 말이다. 이분은 의인 인가 극단적 선택을 한 죄인인가? 한편, 건물주들은 조금도 양보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영업자금이나 시설자금을 빌려준 은행들도 나 몰라라 한다. 소상공인들이 영업이 되던 안 되던 임대료와 이자는 꼬박꼬박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건물주와 은행은 민간 경제시장으로 정부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럼 “소상공인은 공공인가?”하는 물음에는 “공공은 아니지만, 그래서 돈을 벌지 말라고 통제하지는 않았고 인원 제한과 영업시간을 단축했을 뿐”이라고 강변할 수 있다. 은행들은 민간 경제시장이 맞지만 공공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IMF 당시 수조원의 공적자금을 꿀꺽하고 제대로 반환하지도 않았다. 그 공적자금은 누구의 돈인가? 소상공인들은 무너지고 있는데 은행들은 배당과 성과금 잔치를 한다. 원효대사가 생존에 계시다면 이런 사태를 뭐라 하셨을까?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조금만 더 이여 가보자. 정부는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의 88%에게 지급하기로 하고 집행과정에서 90%까지 유연하게 운영하겠단다. 경기도 지사는 나머지 12%에 해당하는 비용을 경기도 예산으로 자체 부담하여 경기도민들에게는 100% 지급하겠다며 논쟁을 벌인다. 사뭇 자기 개인 재산을 털어 내어 베풀듯이 예산당국을 호통 치며 의기당당하다. 1인당 25만원, 4인 가족일 경우 가구당 100만원을 지급하기 위해 34조 9천억 원의 추경예산을 편성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동일한 예산으로 하위(20% 정도)의 국민들과 소상공인들에게 집중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수혜자인 국민들의 의견은 분분할 수 있고 잘살던 못살던 못 받으면 상대적으로 서운하다는 의견도 대다수다. 재난지원금으로 가전제품을 구입하다면 수혜자는 가전제품을 구입한 국민과 가전제품을 만드는 기업 모두일까? 그 기업이 중소기업 이였으면 하는 바램 이다. 그리고 어느 고위공무원의 말처럼 우리들이 개와 돼지는 되지 말았으면 한다. 25만원에....

우리나라 소상공인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높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창업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프랜차이즈 영업점 개설이 주을 이룬다. 그 것도 커피숍, 치킨, 분식 등등....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다보면 청년창업이라며 간판을 근사하게 달아 놓고 있는데 업종은 음식이다. 기존 음식점들이 문을 닫고 있는 이 시기에 모 방송에서는 청년창업 지원프로에 음식을 개발하여 창업하는 것이다. 음식을 청년들이 만들어 팔면 맛이 더 좋고 잘 팔리는 것일까? 음식료의 직업적인 부분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시기에 직종선택을 어는 한 분야로 집중되지 않도록 신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팬데믹 사태가 여러 분야에서 문제점이 노출되기고 하고 새로운 곳에 희망이 보이기도 한다. 희망은 배달 서비스 분야로 배달하시는 분들이 일거리가 많아 과로사 하신 분들까지도 있고 “갑”질에 시달려 한시도 편안하지 못하고 불안해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건은 또 무엇인가? 우리가 평소 “을”로 보아왔던 자들이 “갑”으로 보아왔던 점주를 협박하고 갈아 치우기도 한다. 급기야 어느 점주 분은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셔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다. 전후좌우를 더 살펴봐야 하겠지만 권력화 되어서는 않될 조직이 권력으로 물들어 향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11조1항)”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여야 한다. 과연 그럴까? 지난 8월 13일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가석방으로 출감하고 한 달이 지난 뒤에 삼성의 사회적 기업 책임활동으로 240조원을 투자하고 매년 3만 명의 청년 일자리를 공급하겠다고 한다. 청년들을 채용하고 경력직 사원들을 강제 정리하는 것은 아니겠지? 삼성의 경영 의사결정은 이재용 부회장만의 권한 있지? 취업이 제한된 자가 경영에 의사결정을 해도 취업으로 보지 않는 것인지? 가석방 승인권자인 법무부 장관은 백신확보에 기대한다는 참 의미심장한 주문까지 한다.

이뿐인가. 법을 전공한 자들은 법을 공정하고 평등하게 집행하여 공명정대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법을 집행하면서 법망을 피해 자기들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논평하고 집행하는 법꾸라지들의 향연은 언제나 멈출게 할지 염려스럽다. 자기들끼리 정보를 습득하고 고발을 사주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여 정쟁을 일삼고 국민들의 해안을 흐리게 한다. 이미 재판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은 자는 고발 사주에 의한 조사와 수사로 불법이라며 무죄를 주장한다. 우리 원효대사의 “일심 사상”과 “화쟁 사상”으로 훈육 시켜야 하지 않을까?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의 납품단가를 후려치고 새로운 기술력을 도용하거나 착취하여 자신들의 부가가치를 높이는가 하면 노동집약적인 공정은 분리하여 외주화나 자회사로 만들어 위험을 회피한다. 상생 대상인 중소기업에 경영효율화를 강요하고 통제하여 대기업 자신들의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이를 성과라 자찬하면서 배당과 성과금 잔치를 벌인다. 

권한을 가진 자들은 공정이라는 프레임 속에 청년들을 가두고 뒤로는 자녀들의 입시비리와 채용비리를 저지르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하여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떨게하는 “갑”질 행위를 일삼는다. 고용시장의 진입장벽을 통과하면 의무와 책임을 뒷전으로 하고 업무해태와 직무유기, 무사안일주의에 빠져들고 유아원이나 유치원에서 원생들을 체벌하고 먹지 못할 음식을 먹이는 직업관이 철저하지 못한 관계자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이 없는 미성년자를 성추행과 성폭행하고도 죄책감을 못 느낀다. 친부모나 의붓 부모에 의해 꿈도 꿔보지 못한 유아들이 생을 달리하는 사건들이 끈이지 않는다. 이렇게 성인들에 의한 반인륜적인 사건들이 사각의 바보상자에 장식된다. SNS를 통해 가짜뉴스가 여과 없이 생성되고 본인들의 의견과 상이할 경우에는 무차별적 공격과 신상털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일을 서슴없이 행하는 네티즌들이 SNS의 순기능을 무색하게 한다.      


<원효사상으로 21세기를 정화하자!>     

현세는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이 발달된 문명사회로 전체적인 삶의 질이 향상되었으나 빈부의 격차는 매우 우려스럽게 벌어져 있어 상대적 빈곤의 척도는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좁힐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울러 산업화로 인해 인간의 가치를 노동력으로 인식하여 구분하게 되어 노동에 따라 인격의 가치를 달리하는 문화가 고착화 되어가고 있다.

또한, 정부의 규모와 역할이 커지면서 권력의 원천인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자신들의 권력인양 무소불위로 행사하고자 하는 정치인과 그의 집단들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합의와 협치가 상실한 왕권 통치의 시대로 회귀할 우려가 있다. 이에 반해 국민들은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정부가 지급하는 기본소득에 의지하는 불행한 시대가 도래 할까 우려된다.

아울러, 도래하는 4차 산업혁명에 따라 인간과 기계간의 조화가 필요한 시점이고 이에 따른 고용시장의 변화와 국제관계, 환경보전 등은 불확실한 상태이다.

이에 불교라는 종교를 떠나 원효대사의 사상인 호국 사상과 일심 사상, 그리고 화쟁 사상을 학문적 바탕으로 민중들에게 전파하여 잘살던 못살던 어떠한 일을 하던 국민들은 한 마음이 되어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되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 나라를 발전시키고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대처승을 자처하고 민중과 어울리며 하나가 되고자 했던 원효대사의 꿈을 이어받아 실천하는 계기가 아닐까 피력해 본다. 원효대사 한분만 소환하면 될 것을 국민 모두를 출가 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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