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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복 Aug 31. 2023

잡(을) 디자인(하라)

2) 인간으로서의 내면적 디자인

우리 인류는 대부분 성인이 돼서도 맹수를 맨손으로 혼자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해 두려움과 공포,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즐거움 등 긍정적인 감정보다 높다고 한다.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도덕적 이성과 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면인 육체보다 내면인 정신이 건전하고 건강해야 인간으로서의 누릴 수 있는 향연에 초대되지 않을까? 내면적인 디자인이 필요한 이유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다. 뇌(정신)의 명령 없이 육체 스스로 노동을 할 수 있다면 로봇일 뿐이다. 또한 뇌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육체가 없다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육체와 정신을 완전하게 별개로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공동체는 노동을 이분법적으로 육체노동(블루칼라, blue collar)과 정신노동(화이트칼라, White collar)으로 구분해 머리가 나쁘고 좋음으로 사회적 지위의 낮고 높음으로 연계하려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가르려 하며 프리랜서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2013년도에 데뷔해 “21세기 팝 아이콘”으로 불리는 방탄소년단(BTS)은 육체노동자일까? 정신노동자일까? 아니면 노동자가 아닐까?


활성화한 자본시장의 소비자이면서 공급자이기도 한 인간은 자본시장의 주체고 공급자로서 제공하는 노동력은 자본시장에서 상품인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 노동력은 인류에게 유익한 재화를 창출하고 생산하는 활동에 활용하기 위해서만 거래돼야 한다. 특히 노동력이 아닌 육체나 정신이 거래 대상이 돼서는 안 되고 소비자로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동력을 탐닉해서도 안 된다.


고대 로마시대의 검투와 같은 격투기는 생사를 다투고 패자는 승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검투사는 노예 신분이거나 신분 상승을 꿈꾸는 지원자였다. 근대의 격투기는 “스포츠 경기”라 불리며 선수를 육성하고 규칙을 만들어 선수를 보호하고 선수 의사를 존중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에 이르는 불운한 선수들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같은 인간이면서 관중들은 이를 보며 환호하고 열광한다. 그리고 승자만을 기억에 남겨 둔다.


‘스포츠’라는 용어는 “기분 전환이나 육체적·정신적 기쁨”이라는 뜻을 지닌 옛 프랑스어 ‘디스포흐(disporten)’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관중들은 응원을 통해 선수들의 사기를 높여주면서 교감한다. 이도 성이 차지 않아 응원단이 동원되고 유혈이 난자한 경기에서 진행 회차를 알려 주는 도우미가 등장한다. 각종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이들의 몸놀림과 노출이 심한 의상은 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 속에 가둬 둔다.


이렇게 공급자들은 소비자인 관중들의 이목을 끌어모으기 위해 더욱 과감해지고 소비자들은 더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 머지않아 전신을 문신(Tattoo)만으로 치장해 소비자들을 현혹하는 공급자들이 생기고, 문신이 패션으로 등장하여 거리를 활보하지 않을까?


세대가 교체되고 문명이 발달하고 삶의 질이 향상돼도 미완인 우리 자신을 완성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분출되고 있다. 이런 욕망 중에는 인류에게 유익함을 제공하는 욕망도 있는가 하면 건전하지도 목적성이 뚜렷하지 않아 가치가 없는 욕망도 있다. 가치 없는 욕망은 이뤄지지 않음에 좌절하거나 감언이설에 능하고 허무맹랑한 자를 추종한다. 그의 노예로 전락하거나 일시적 쾌락의 늪에 빠져 결국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마저도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다.


원효대사께서는 달고 시원하게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음을 알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하셨다. 대처승을 자처하며 깨달음을 실천해 후세에 원효사상을 남기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하시고 벌을 독촉하던 자들이 모두 아무 일 없이 떠나자, 여자에게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셨다.


성찰은 반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똑같은 실수나 잘못,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라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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