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선물하는 부모
5년 전쯤 큰 아이가 늘 다니던 어린이 전문 치과에서 과잉진료를 받았던 적이 있다. 이후 믿을 수 있는 지인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집은 서울이지만 아이들 치과는 (안막힐 때 50분 정도 거리) '부평'으로 다니고 있다. 6개월에 한번씩 정기 검진을 받는데 하필 어제 (수도권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그날)가 예약일이었다. 폭우 소식에 상황을 보고 갈지말지 결정하려 했는데 출발하는 시점에는 빗줄기가 잦아든 상태라 별 걱정 없이 출발을 했다. (참고로 필자는 어릴적부터 잇몸이 안좋아서 그리고 충치 치료로 많은 고생을 했었기 때문에 아이들 치아 관리는 신경을 쓰는 편이다. 치과도 정기적으로 가서 검진을 받고, 저녁 양치시에는 치실도 사용하게 하고 있다.)
치과에 무사히 도착해서 진료를 받았다. 큰 아이는 곧 교정치료를 시작해야 하고, 둘째는 괜찮지만 이와 잇몸사이 양치를 더 잘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진료를 마치고 치과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귀가하기로 했다. 부평에서 저녁을 먹고 퇴근시간 정체를 피해서 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평일 저녁이라 식당은 한산했고, 배터지게 맛난 음식을 먹은 뒤 아이들은 놀이방에서 놀고 나도 책을 좀 보다가 저녁 8시 반정도가 되어 집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아뿔싸, 부평에서도 꽤 굵었던 빗줄기가 서울로 가면 갈수록 앞이 안보이는 폭우가 되었다. 나중에 뉴스로 알게 된 것이 비가 인천에서 서울로 이동한 것인데, 우리가 그 비를 따라 움직인 셈이었다. 폭우로 차선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오랜만에 운전할때 쓰는 안경도 쓰고, 와이퍼 최고속도, 비상등까지 켜고 초 집중/긴장 상태로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올림픽 대로까지는 그래도 잘 왔는데, 올림픽 대로에서부터 차들의 거북 운전이 시작됬다. 비가 말 그대로 앞이 안보이는 지경, 가장 우측 차선은 차들이 반쯤 잠기니 비워진 그런 상태.. 평균 30키로의 속도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까아아악~~~ 와하하하하~~~" 그 와중에 뒷 자리에서는 비명과 폭소가 연신 쏟아졌다. 아이들은 이런 비가 즐거운가 보다. "이래서 자연이 무서운거야~"라며 동생에게 훈계(?)하듯 말하는 큰아들.. "아니~ 이거 정도것 해야(?)하는 거 아냐?"라는 둘째 아들.. 잔뜩 신이 낫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웃음과 대화가 되려 나에게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 빠르게 가는 것 보다 최대한 안전하게 천천히 집으로 향했고, 마침내 올림픽 대로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와~~ 드디어~~" 나보다 더 기뻐하는 아이들이었다. 올림픽 대로를 빠져 나와서도 도로는 물바다였고, 동네의 언덕길들은 마치 계곡 같은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주차장 어떻해요?" 큰 애가 주차장이 잠긴 것 아니냐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주차장은 말끔했다. 집에 도착한 아이들은 일부러 우산을 쓰고 빗속에 들어가보고, 집앞에 계곡(?)물도 감상하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사실 위험하기도 하고, 힘들었던 운전이었지만 아이들 덕분에 여유있는 마음으로 집에 잘 도착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를 몸소 느껴보는 기회, 자연의 무서움을 체험해보는 기억에 남을 시간이었다. 오늘 뉴스에 인명피해까지 있다고 하니, 마음도 아프고 자연앞에 나약한 인간을 느끼면서 일상과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경험도 아이들과 함께여서 의미가 있었다. '스칸디 부모는 자녀에게 시간을 선물한다'는 책이 있다. 우리나라의 부모들이 아이와 함께 하는 절대적 시간 자체가 유럽 등의 국가 대비 매우 적다. 페스탈로치는 '부모는 자녀에게 세 가지를 베풀어야 한다. 바로 시간, 관심, 애정이다.'라고 했다. 첫 번째가 바로 시간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아빠와 아들 관계가 서먹한 이유로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거의 교류가 없는 부자관계가 꼽힌다. 아빠가 물론 바빠서이기도 하겠지만, 육아는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인식도 크다고 본다. 물론 요즘 아빠들의 인식은 많이 바뀌었고 바뀌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서먹한 상태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이제 은퇴한 아버지가 시간이 많아 졌더라도 그 관계가 회복되기는 힘든 것이다.
내가 처음 육아휴직을 한지 이제 5년째이다.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나는 주중에는 아이들을 거의 못 봣을 것이고, 주말에도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아이들과 마음껏 놀지는 못했을 것 같다. 물론 어제같은 경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육아휴직 이후 큰아이는 유치원생에서 5학년이 되었고, 작은아이는 4살에서 2학년이 되었다. 이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집안일도 척척하고, 둘이서 뭐든 해내는 모습을 보면 참 대견하다. 그리고 어제 폭우 속에서 자연의 무서움과 아이들과의 행복함을 동시에 느끼다보니 새삼 깨달았다. 언젠가 먼 훗날에 이 시간을 되돌아 본다면 일보다 아이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내 선택은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