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육지를 오가며 세 번의 계절을 보냈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제주 밖 본토를 ‘육지’ 라 부릅니다.)
그동안 저는 지인의 오피스텔에 머물며 제주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돌아갈 길을 계산하기보다,
머무를 자리를 준비할 때라고요.
그렇게 저는 제주에 뿌리를 옮겼습니다.
센터에서 주민이 된 걸 축하하는 문자가 왔을 때
묘했던 내 기분은 햇살과 함께 반짝였습니다.
저는 진짜 제주도민이 되었습니다.
(제주도민이란 제주에 주소를 두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처음엔 여행자의 설렘으로 제주의 바다를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더 깊이 이곳에 기울었습니다.
바람도, 바다도, 하늘도,
그리고 저를 다정하게 맞아주던 따뜻한 사람들도.
제주는 어느새 제 마음을 가장 포근하게 감싸주는 곳이 되었습니다.
제가 구한 집은 2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던 새 집이었습니다. 법적 절차 때문에 비워져 있었고,
저는 그 집의 첫 번째 숨이 되었습니다.
텅 비어 있던 공간이 제 물건과 향기로 채워지며
이곳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두근거림과 안도감, 많은 감정들이 내 마음을 스쳤습니다.
제주에는 제주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들이 있습니다. 그중 연세라는 주거 문화가 있는데,
1년 치 월세를 한 번에 내는 방식입니다.
아마 이곳의 신구간 이사 풍습에서 비롯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구간이란,
대한 후 5일부터 입춘 3일 전까지로
신들이 임무를 교대하며 하늘로 오르는 시간,
그때 이사를 하면 재앙 없이 새로운 보금자리로 간다고 믿는 풍습입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제주도 사람들은 그때 이사를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한여름에 이사를 했습니다.
그것도, 그 집의 첫 숨이 되어...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참 큰 행운이었습니다.
시세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제주가 나를 응원하며 건네는 선물같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새 시작이 언제나 꽃잎처럼 부드럽기만 하지는 않았겠지요. 이삿짐을 정리하고 가전을 들이고 분주하게 하루를 이어가던 어느 날,
냉장고 설치가 늦어 상한 음식을 먹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온몸에 두드러기가 번지며 입술과 눈이 부어올랐습니다.
몸이 아플 때는
마음의 소리도 함께 들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사와 변화 속에서 기쁨과 감사와 함께
지인과의 감정으로 인한 실망과 속상함도 바쁘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몸을 아프게 한 것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병원에서는 기도까지 부으면 응급실을 가야 하는 위험한 상태라고 했고 급히 주사를 맞고 약을 먹었지만 며칠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일본에 다녀와야 했던 일정 속에서도 알레르기는 계속 올라오며 내 마음의 아픔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리던 시기였지만 다행히,
그 여정을 함께해 준 지인 덕분에
마음과 몸이 금세 회복되었습니다.
따뜻한 동행 하나가 몸을 회복시키고
마음에 다시 빛을 켜주었습니다. 내 얼굴엔
다시 웃음과 마음엔 평화가 돌아왔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저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겉으로는 다정해 보여도 한마디 말로
조용히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까워질수록 상처를 약점으로 잡아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 나쁜 감정이 쌓이기 전에
그 신호를 빨리 읽고 거리를 두는 일은 미움이 아니라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빛나는 척하지만 속에 어둠을 품은 사람도 있지요.
묘하게도 그들은 조용한 사람들을 더 괴롭히곤 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아직 낯설고 서툴지만,
그것들은 다시 그들에게 되돌아갈 것이고
바람은 마음의 먼지를, 파도는 오래된 감정을 씻어낼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조용히 기록합니다.
저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과 함께할 것.
제가 빛날 수 있는 곳에 시간을 쓸 것.
걱정 대신 움직임을, 무거움 대신 햇살을,
혼란 대신 평온을 선택할 것,
꼭 그렇게 된다는 것을..
언제 사라질지 모를 젊음 속에
유쾌한 기분으로 더 많은 기쁨을 누리고 싶은 마음.
조금 느리더라도 고운 마음으로, 혼자라도 고요하게 흐르는 시간을 품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 제주에서
저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합니다.
오늘, 그냥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