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조용한 행복

by 행운의 여신


26년 설을 맞아, 저는 다시 산방산을 찾았습니다.
해마다 새해는 오지만 지금 이 산을 오르는 제 발걸음은 조심스럽고 설렙니다.
문득, 이 산과의 인연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조용히 되짚어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은 것은 동네 헤어숍에서였습니다. 머리를 손질해 주시던 원장님께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산방산 꼭대기 굴 안에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그곳에서 정성껏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해요.”

저는 불교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간절히 빌 소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굴 안의 절’이라는 말은 제 마음을 이상하게도 오래 붙들어 두었습니다. 바위 속에 숨겨진 기도처라니요.

산방산에 절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사계 바다로 향하기 위해 지나쳤던 풍경일 뿐, 제 마음은 닿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그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전히 그 산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저와 산방산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산방굴사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깊은 고요를
품고 있었습니다. 오른편에는 산방산 보문사가,
왼편에는 광명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오르내리다 보니
이 산에 네 개의 사찰이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산에 네 곳의 기도처라니, 이곳은 애초에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내기
위해 태어난 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발을 디뎠던 날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계단을 조금 오르자, 부처님 상 보다 제 눈에 들어온 건 바다와 용머리 해안이었습니다.
푸른 물결과 하늘이 하나로 이어진 풍경.

가슴이 시원하게 열리며 오래 묵어있던
탁한 감정들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제가 조금씩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앞으로 이곳을 자주 찾게 되겠구나.’
그리고


‘왜 이제야 왔을까요’

산방산이 제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듯했습니다.
왜 이제야 왔느냐고, 오래 기다렸다고..

계단을 오를수록 길목마다
‘명예 기원의 자리’, ‘사랑 기원의 자리’, ‘생명 기원의 자리’, ‘건강 기원의 자리’라 적힌 명당 터라는 표지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곳마다 누군가의 간절함이 쌓여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저는 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제 마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난 어떠한 간절함과 이끌림으로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아마도 이 산은 욕심 많은 소원은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대신 제 삶에 정말로 필요한 단 하나의 소원은 품어 주는 곳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산방굴사에 이르기까지
한라산 백록담의 봉우리가 던져져 태어났다는 산방산의 이야기와 산방산의 수호신인 여신 산방덕이 들어갔다는 굴을 상상하며 산방산이 아닌 한라산을 오르는 사람처럼 바람을 만끽하며 올라갔습니다.

지금은 짧게 느껴지는 오름의 끝.
굴 안쪽 천장 암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만날 수가 있는데, 그 물은 여신 산방덕의 눈물이라 전해지고 그 약수를 세 모금을 마시면 사랑의 복을 얻고 여섯 해의 수명이 늘어난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올해 저는 그 약수를 다시금 마셔보았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저는 잠시 산방덕이 되어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기에 스스로를 굴에 숨어버렸을까.
얼마나 깊은 실망과 상실이
세상과 멀어지게 했을까.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마음에 돌처럼 굳은 산방덕을 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에게 지치고, 세상에 상처받아 스스로

단단히 닫아버리고 굳어버린 마음 말입니다.

산방산은 제게 질문을 건네는 듯했습니다.
지금 네 마음은 어떠하냐고..

산을 오를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냅니다.
보이지 않아도 늘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유 없이 저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받아들입니다.

좋은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찌꺼기들, 제 안에 남아 있는 돌 같은 마음을 갈고 또 갈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맞지 않는 인연과는 억지로 부딪히기보다, 때로는 물러서는 용기도 필요하겠고요. 무엇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저 자신을 먼저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는 다짐도 새겨봅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기에,

관계 속에서도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아픔 속에서도 배웁니다. 늘 무언가를 깨닫고

보이진 않아도 조금씩 자라납니다.

산방덕이 바위가 되어 흘린 눈물처럼
우리의 상처나 아픔 또한 언젠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고단한 삶마저도 감사로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산방굴사에 도착하면 저는 속으로 산방덕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항상 좋은 마음을 낼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꽃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행복하며,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어 행복합니다.

우리가 이미 얼마나 많은 선물을 받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돌처럼 굳어버린 마음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할 것입니다.
산방덕의 눈물마저 녹여낼 수 있는 따뜻함으로 말입니다.

오늘도 제 마음을 어루만져봅니다.
굳어지지 않도록, 상처에 머물지 않도록.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매일 살아 있는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환한 행복 속에서
함께 사랑하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오늘도 조용한 행복을 쌓아 갑니다.





산방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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