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무엇이고, 예술가는 누구인가?
수업 중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나요?"
나는 너무 당연하게 "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들로 근거를 대야할지 몰라서 망설였다. 나는 모두가 각자만의 예술을 하고있다고 생각하지만, 수십명이 있는 강의실에서 정리되지도 않은 의견을 내보이기엔 당시에 내 용기가 부족했던 탓이다.
교수님께서는 "누구나 예술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예술을 창작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정말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는 없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고, 수업이 끝나고도 마음 한 켠에 남은 찝찝한 감정을 없애고자, 예술이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를 내리고 싶다고 느꼈다.
그러다 <예술은 죽었다> 책을 발견했고, 이 책이 나에게 답변을 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 형광펜으로 많은 밑줄을 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완독했고,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서 조금은 정의내릴 수 있게 되었다. 내 머릿 속에만 둥둥 떠다니던 생각들이 이 책에서는 활자로 정리가 되어있었다. 이 글에서는 내가 책을 읽으며 인상깊었던 부분과, 예술이 무엇인지, 앞으로의 방향성은 어떠한지 등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정말 오랜만에 형광펜으로 밑줄 많이 그으면서 읽었던 책이다.
당신은 '예술'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몇 억원에 거래되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 반 고흐나 뱅크시의 작품?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예술의 본질을 흔들어놓았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예술은 점차 상품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예술의 본질적 가치는 희석되었다. 예술 작품은 더 이상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단순한 투자 대상이나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또한 예술 교육의 부재도 예술의 죽음에 한몫 했다. 현대 사회에서 예술은 종종 생존 이후에 논의되는 불필요한 사치로 여겨진다. 이로 인해 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관객이 줄어들었다.
작가는 묻는다. "미술관은 예술이 살아날 수 있는 공간인가? 혹은 죽는 공간인가?"
미술관이라는 제도화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예술들은 본연의 생동감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미술관의 공간은 지나치게 정제되고 보편화된 '미적 경험'을 강조한다.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할 예술을 성스러운 오브제로 변질시킨다. 예술은 하얀 벽에 걸리며 시간과 공간에서 단절된다. 작가는 미술관이 단순히 예술을 전시하고 보존하는 공간이 아니라, 삶과 예술을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어야 한다고. 미술관에 걸려 있는 것도 좋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와닿고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되는 작품들은 예술을 특권층의 전유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교육 기관으로서의 미술관들은 그 기능을 상실하고 사람들이 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예술은 '어려운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p.33
20세기에 들어서며 시장의 상품화는 더욱 가속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미술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87년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약 4천만 달러에 낙찰된 사건은 예술이 자본의 게임으로 변했음을 상징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19세기 이후 미술사와 비평 이론이 학문으로 체계화되면서 예술은 점차 전문가의 영역으로 격리되었다.
또한, 아카데미는 예술의 가치를 소수 엘리트의 판단에 맡기는 시대를 열기도 했다.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가르는 권위는 학계와 비평가들에게 넘어갔고, 예술은 대중의 삶과 동떨어진 채 전문가들의 평가만을 기다리는 구조에 갇혔다.
이렇듯, 시장은 즉각적인 매력과 소유 가능성을 우선하고, 아카데미는 지적 분석과 엘리트의 권위를 강요하며, 둘 다 예술을 삶에서 멀어지게 했다. 이는 예술이 사람들과의 소통, 공동체적 맥락을 잃고 소비와 이론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술이 무엇인지 명확한 경계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스스로 예술을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이 혼란은 예술계의 엘리트주의를 부추긴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중세 교회에서 신의 본질을 알 수 없는 신자들이 구원을 성직자에게 위탁했던 것처럼, 예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현대인은 그 정의를 전문가 - 비평가, 큐레이터, 혹은 예술 시장의 권위자 - 에게 맡기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대중의 손에서 떠나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변질되었다. p.38
"서로 너무도 다른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려면, 지금 같은 상품화와 격리의 추세가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이 시장과 논리와 아카데미의 틀에 완전히 종속되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다. p.51
예술의 탄생
예술이란 무엇인가? 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예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예술은 전부 삶에서, 사람들과 연결되는 맥락 안에서 등장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문학적 걸작으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대중을 위한 공연으로 쓰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종교화도 신앙의 도구였을 뿐 아니라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작가는 예술이 언제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숨 쉬어왔다고 한다. 예술은 특정 소수의 손에 쥐어진 고고한 대상이 아니라 시장 광장의 소음과 교회 종소리 속에서 피어났다.
작가는 책 속에서 예술의 사람들과의 연결에서 탄생했다고 하며, "인류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공존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목적으로 적합하다고 말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과 같은 순수함을 꿈꾸되 그 순수함이 사람들과의 연결로 이어질 때, 비로소 예술은 살아 숨 쉬며 제 역할을 다한다고 말한다. 예술이 특정한 정의나 목적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관점을 담아낼 대, 그것은 진정한 소통의 도구가 된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에서 예술은 어떻게 변했는가? 예술이 죽고나서, 이 예술의 종말을 새로운 국면의 탄생으로 바라본 단토라는 예술가도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해졌고, 어떤 것도 예술이 되지 못 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하며, "예술의 역사는 더 이상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예술의 주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술은 종교적 설교나 미적 쾌락같은 과거처럼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거나 규범적 정의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자기 성찰의 도구로 변모한 것이다.
예술은 언제나 맥락 속에서 태어났다. 고대 동굴 벽화는 사냥과 생존의 이야기를, 르네상스 시대의 성화는 신앙과 공동체의 가치를 담았다. 심지어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운동조차 전쟁과 산업화라는 격변의 시대를 반영하며 저항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예술은 점점 그 맥락을 잃어버린 듯 보인다. 미술관의 하얀 벽 안에서, 혹은 디지털 화면 속에서 예술은 더 이상 삶과 직접적으로 얽히지 않고 고립된 객체로 전락했다. p.26
삶의 맥락과 함께 만들어진 '예술'의 특성을 보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답할 수 있다. 작가는 예술은 원래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서로 다른 경험을 공유하며,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예술의 본질은, 현대 사회에서 예술이 고립된 개별 작품으로 남아 관객과의 대화를 잃으면서 옅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예술은 본래 "서로 너무 다른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놓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 생각에, 예술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같은 미술 사조나 미술 이론을 배우면 예술을 더 깊게 향유할 수 있는 건 확실하다. 그러나 예술을 향유하기 위한 필수 단계는 아니다. 예술은 그냥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겪어 온, 우리가 현재도 인간으로서 겪고 있는 그 삶과 공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 예술의 정답을 물을 필요도 없다. 내가 느끼는 것이 정답이니까.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담아내는 방법이었다.
예술은 종교였고, 신화였고, 역사였으며, 철학이었다. p.79
이 책에서는 정말 많은 예술가들을 소개해준다. 특히, '예술가가 여기있다'라는 관객들과 눈을 맞추는 행동 예술을 했던, 아브라모비치가 기억난다. 예술을 시장적 가치에만 치중했다면 나올 수 없었던 예술을 한 예술가. 아브라모치니는 관객을 감상자가 아닌 감정과 존재를 공유하는 참여자로 초대했다. 또한 그녀는 12일동안 갤러리의 좁은 공간에서 오직 물만 마시며 침묵 속에 머물면서 관객과 마주하는, 그런 형태의 예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빛, 물, 안개 같은 자연 요소를 예술의 도구로 삼는 올라퍼 엘리아슨, 자신의 신체가 경험한 구조적 불평등을 미국의 흑인 여성 작가 캐리 메인 윔스 등 우리의 감각과 정체성을 확장하는 여러 예술가들을 작가는 소개해준다. 이를 보며 정말 많은 현대 예술가들이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술은 이처럼 타자의 감각을 마주하게 하며, 우리가 가진 세계의 지각을 흔든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 '다름을 보는 눈'이 아닌, '다름을 느끼는 몸'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작가가 AI가 현재 우리에게 '새로운 예술의 정의'에 대해 묻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사진의 탄생이, "사실적인 에술이 진정한 예술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듯이, 이번에도 예술이 조금 더 확장하는 데에 크나큰 질문을 던지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나는 예술을 통해 내가 겪은 삶의 국면, 그리고 가끔은 내가 겪지 못한 삶의 국면을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를 통해서 감각하고, 나의 경험을 떠올리고, 겪지 못한 경험을 상상해보며 나의 정체성을 확장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이 사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고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답이 떠올랐다.
예술 없이 우리는 살 수 있다, 그러나 '행복하게' 살 순 없다.
예술과 함께 사는 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삶을 '잘' 사는 방법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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