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계 속 오해와 사랑을 무대로 재현하다
"안녕. 나의 빛, 나의 악몽"
1930년대 경성.
카페에서 쉬던 세훈은 히카루라는 죽은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 출간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녀의 진짜 정체도 밝혀진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세훈은 유치장에 갇혀 있는 소설가 이윤을 찾아가 유고집 출간을 중지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이윤은 출간을 중지해야 할 정확한 이유를 밝히라며 소설가 김해진이 히카루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까지 꺼내 자랑한다.
세훈은 결국 히카루에 대한 숨겨왔던 이야기를 꺼내는데...
김해진 役 에녹 / 김종구 / 김경수 / 이규형
정세훈 役 김리현 / 문성일 / 윤소호 / 원태민
히카루 役 김히어라 / 소정화 / 강혜인 / 김이후
이윤 役 이형훈 / 박정표 / 정민 / 김지철
이태준 役 이한일 / 김승용 / 김지욱
김수난 役 김태인 / 이승현 / 손유동 / 장민수
김환태 役 김보현 / 송상훈
흥미로운 점은 등장인물의 모티브가 대다수 실제 한국 소설가에서 왔다는 것이다.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당대 최고의 소설가라고 칭해지는 '김해진'은 소설가 '김유정'을 모티브 삼았다고 한다. 염세적이고 현실주의적인 해진의 친구 '이윤'은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을 모티브 삼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소설가 '이태준', 시인 '김기림', 비평가 '김환태'와 같이 실제 인물들을 모티브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 관람하니 훨씬 몰입이 잘 되었다. 또한, '히카루'라는 가상의 인물 또한 김유정이 생전 '박봉자'라는 여인에게 답도 오지 않는 편지를 여러통 보낸 일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마치 그 때의 경성으로 들어가서 문학인들의 대화를 엿 듣는 기분을 주는 작품이었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주목 포인트 1. 예술이 사람을 살린다
이국종 교수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살리는 사람들의 수보다, 예술가가 살리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다"라고. 나는 작품 속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칼을 들지 않고 펜을 든 문학가들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극 중 주변인들은 말한다. 방 안에서 글만 쓰지 말고, 밖으로 나가서 싸우라고. 그러나 나는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더욱 예술을 통해 시민들을 더 효과적으로 깨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작품 속 '칠인회'가 끊임없이 문학을 탐구하고, 월간지를 낼 때 마음 속으로 깊은 응원을 보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김유정, 이상과 같은 문학인들의 작품들을 우리가 계속 읽고, 배우고, 영감 받고 있는 걸 보면 그 때 당시 펜을 든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주목 포인트 2. 해외로 진출하는 창작 뮤지컬
이 작품은 내한 공연도 아닌데, 좌우에 외국어 자막이 동시에 서비스 되고 있었다. 일본어와 중국어다. 나는 그걸 보고 단순 내수용이 아닌, 세계 특히 아시아로 뻗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는, 혹은 그러한 수요가 이미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근데 알아보니 뮤지컬 '팬레터'는 중국과 일본, 대만에 진출한 적이 있다고 한다. 2022년부터 중국에서 매해 라이선스 공연을 이어오고 있으며, 2024년엔 일본 초연까지 성황리에 마쳤다. 또한 런던에서 영어 버전 쇼케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서사와 극이 탄탄한 극은 국내뿐만이 아니라, 해외에도 먹히는 것 같다. 특히 아시아에서 강세를 가지는 감정선이나 서사의 진행 방식을 '팬레터'가 가졌을 수도 있겠다.
주목 포인트 3. 페르소나
극 중 '세훈'은 본인의 이름이 아닌 '히카루'라는 필명을 사용해서 '해진'과 편지로 소통한다. 이 과정에서 세훈은 점점 히카루라는 가상의 인물에 몰입하게 되고, 마치 새로운 자아가 나오듯이 글을 쓰게 된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며 세훈의 페르소나, 자아 중 하나가 히카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이유로 필명을 사용했지만, 세훈은 히카루를 통해 자신 안에 있었던 모습이지만 쉽게 드러내기 어려웠던 모습들을 드러냈다. 그래서 오히려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언급한 포인트 외에도 뮤지컬 '팬레터'는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만약 내가 해진과 편지를 주고받는 세훈이었다면, 내가 히카루였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을까?" 그리고 "해진이 히카루가 결국엔 세훈이었다는 걸 알고 겪은 감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이었을까?" 또한 뮤즈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도 뮤즈가 있을까? 모든 예술가들에는 뮤즈가 있는걸까?" 등 나의 메모장에는 여러 기분 좋은 물음표들로 가득했다.
주위에서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인 '팬레터' 언젠가 꼭 한 번 보고싶었는데, 이번 10주년 공연으로 봐서 더욱 의미있었다. 문학을 만들어내는 낭만적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대 위로 올라온 것만으로도 내게는 너무 큰 의미가 있었다. 한국 문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생에 어떤 에피소드들을 겪었는지 잠시 경성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기분이었다. 이 작품을 보고나서 김유정과 이상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어지고, 그 사람들이 어떤 일생을 살았는지 궁금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이 공연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부디 더욱 널리 퍼져서, 한국 문인들의 이야기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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