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동네 맛집탐방
소문 듣고 찾아간 안성 우정집에 도착, 식당 안에 들어서자 종업원은 장사 끝났다며 손사래를 쳤다. 재료가 소진됐다는 것이다. 시계를 보니 12시 10분.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종업원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렇게 먹고 싶으면 다음에 오렴”같은 표정이었다. 약간의 실랑이. 식탁에서 냉면 나오기 기다리는 손님들 중 나의 불만 토로에 관심을 갖는 이는 한 명도 없다. 그만큼 흔한 풍경이이라는 뜻.그만큼 우정집은 요즘 안성에서 사람이 많이 찾는 가장 핫한 식당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다.
주방 안을 들여다보니 인상 좋은 작은 키의 할머니가 찬물에 면을 식히고 있었다. 딱 보니 황해도가 고향이라는 주인 할머니였다. “멀리서 왔어요 점심 좀 주세요”라고 너스레를 떨자 어르신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 탁자로 가서 기다리라고 손짓을 한다. 나는 쾌재를 불었다. 이 모습에 겸연쩍은 건 내가 아니라 입구에서 인상을 쓰면서 출입을 막았던 종업원. 마지못해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맛집을 찾다 보면 재료가 떨어져 문전박대당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워낙 유명한 집이라 찾는 이가 많으니 재료는 금세 소진되는 건 당연한 일. 그 유명한 안양 인덕원 돈가스집 ‘에버그린’에서도 그런 경우를 당한 적이 있다. 웨이팅을 하는데 내 앞에서 보기 좋게 (?) 줄이 딱 끊겼다. 종업원은 쌀쌀맞게 “오늘 장사 끝났어요”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식당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때는 그냥 포기해선 안된다. 종업원 뒤를 졸졸 따라 들어간 나는 주인처럼 보이는 이에서 “부산에서 왔어요. 맛만 보여주세요”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의 입에서 “돈가스 잘라낸 게 있는데 그거라도 드시고 갈래요? 대신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덕분에 그 유명한 수프도 먹고 돈가스도 먹었다. 주인은 정말 돈을 받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 눈에 들어온 건 메뉴판. 냉면전문 우정집의 위엄은 메뉴판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물냉면 9000원 비빔냉면 9000원 사리 4000원’. 냉면집에 당연히 있어야 할 만두도 없고, 그 흔한 소주도 없다. 더 놀라운 건 공식적인 영업시간이 9시 30분에서 2시까지라는 것. 일요일은 당연히 휴업. 내가 입구에서 황당했던 건 2시까지 영업을 한다는 걸 분명히 알고 갔는데 12시 15분에 재료가 소진돼 입장불가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정집의 영업시간은 정확히 말하면 ‘9시 30분부터 재료가 소진될 때까지’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9시 30분에 와서 냉면은 먹는 걸까. 그게 궁금했던 나는 숙취로 고생하다 차가운 냉면 육수로 숙취를 한방에 날려버렸던 그때 경험이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났다. 맞다. 해장에는 냉면이 최고다. 아마도 10시 전후 전날 잔뜩 먹은 술로 고생을 하던 술꾼들이 해장을 하러 우정집에 하나 둘 모여들 것이다. 그들은 냉면이 나오자마자 육수를 들이키며 밤새 자신을 불면을 몰아넣었던 아픈 속을 살살 달래겠지. 우리도 그랬으니까. 그 눈이 시리게 푸른 그 젊은 직장생활시절, 우리도 그랬으니까.
서론이 너무 길었다. 우정집 냉면은 황해도 냉면이다. 면은 부드러웠고 육수맛은 독특했다. 밍밍한 평양냉면에 익숙한 분들은 짙은 육수 색깔 보고 놀라고, 밍밍하지 않은 육수맛에 살짝 당황할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 그렇다면 평양냉면을 하늘처럼 떠 받드는 마니아들이 우정집 냉면을 먹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황해도 냉면의 특징인 엷은 간장맛 때문에 ‘이건 냉면이 아니다’며 눈살을 찌푸릴지, 아니면 ‘이런 냉면도 있었군’하며 긍정적인 표정을 지을지. 하지만 어린 시절 평양이 고향인 부모님 덕분에 짜장면 맛보다 냉면맛을 먼저 알았던 나로서는 이 맛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그때 내가 살던 동네에는 몇 개의 냉면집이 있었는데 특히 ‘강서면옥’에 많은 사람이 찾았다. 또렷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 그 강서면옥의 냉면 맛이 이러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훗날 부모님께 여쭤보았을 때 “그건 짙은 육수맛이지 간장맛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였을까. 우정집 냉면을 입에 넣었을 때 나는 울컥했다. 짙은 그 맛이 너무 익숙해서? 지금은 이미 사라져 버린 강서면옥의 추억 때문에? 모르겠다. 하지만 아스라이 사라져 버린 옛 기억이 떠오른 건 분명하다. 색 바랜 옛 사진에서 나올법한 간판과 몇 개의 탁자, 그리고 오래된 식초병. 냉면 그릇. 눈에 익은 무김치. 그리고 냉면을 먹을 때마다 사리를 시킨 후 가위로 반을 뚝 잘라 내 냉면 그릇에 넣어주던 아버지의 손길이 그리웠는지 모른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내 앞에 아버지가 앉아 계셔서 “냉면을 먹을 때는 먼저 육수를 한번 들이키고 식초와 겨자는 넣지 않는 거란다.”라는 음성을 들은 것도 같다. 그래서 가슴이 먹먹해졌는지도 모른다. 음식은 추억이 곁들여질 때 더 맛있다. 우리가 냉면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건 반드시 그 맛 때문은 아니다. 짜장면도 마찬가지다. 먹는 동안 옛 기억이 떠 오르고 이미 내 옆을 떠난 많은 사람들을 떠오르게 만드는 묘한 마법을 부리기 때문이다. 우정집에서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으로 돌아간 내 모습을 보았다. 그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고 싶으면 지금 당장 안성 우정집으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