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린 나뭇가지와 기회에 대하여, 스스로에 대하여

기회와 안주 사이에서

by 몽당연필


보고 싶은 대로 보며, 듣고 싶은 대로 들으며, 생각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사람이라면, 우리는 같은 세상에 있으되 각기 다른 색안경과 이어폰을 꽂고 다님으로써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같은 것을 보고 듣더라도, 그것은 각자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형이 나에게 이야기한, 절벽 위에 나온 부실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인간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인간이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간신히 절벽에 튀어나온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는 부실했다. 그렇기에 인간은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자신을 살려 달라고, 이 절벽에서 자신을 꺼내 달라고. 그의 기도가 닿았고, 하느님은 그 인간에게 말했다.


“살려줄 터이니 걱정 말고 먼저 붙잡은 나뭇가지를 놓아라”라고 말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믿었다. 그렇지만 그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지금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가 자신의 목숨을 지탱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 미치지 못했다.


손을 놓는다는 공포는, 그가 하느님의 말에 전적으로 기댈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인간은 나뭇가지를 놓지 못하고 절벽에 계속 매달려 있게 된다.


이 이야기를 통해 형은 말한다. 사람은 결국 저 나뭇가지에 매달린 자와 같이 듣고 싶은 대로, 보고 싶은 대로 본다. 하느님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조차 그는 곧이곧대로 보지 못한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손길과 같이, 인생에 있어 바뀔 기회가 종종 오지만, 자신이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에 정신이 팔려 그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기에,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잡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이다.


형이 보았을 때, 내 현재 상황과 비교해서, 친구로부터 들어온 제안은 좋은 기회이다. 그것은 형 스스로의 생각과, 이제까지 형이 스스로 살아오며 쌓은 경험과 그로 인한 깨달음, 그리고 형의 가치관에 기인한다. 형의 말과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다. 형의 생각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형이 이야기해 준 일화를 다르게 해석한다.


절벽의 나뭇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인간은 왜 기회가 왔음에도, 구원의 손길이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붙잡은 손을 놓지 못하는가?


그것은 확신이 안 섰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은, 자신이 먼저 붙잡고 있는 것을 놓고 나서야 비로소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원이 과연 이 절벽에서 구원해서 생존시켜 주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서 구원해 주겠다는 것인지, 매달린 자는 알 수가 없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기회가 와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현재 처한 상황이 절벽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것과 같음에도 기회를 붙잡지 않거나 못하는 것은, 붙잡은 기회가 현재 손에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에 비해 더 안정적인 것인지, 아니면 썩어서 부러질지도 모를 나뭇가지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삶에서 보장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보장되지 않는 것을 보장하고자 발버둥 쳐 세운 것이 문명이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확실한 것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을 하면 정년이 보장된다거나, 어려운 자격증을 획득하면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이 보장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은 자신이 붙잡고자 하는 기회가 현재 자신이 거머쥔 현실보다 더 나은 삶을 보장해 주는지 어떻게든 알고 싶어 하는 존재다.


마주한 기회는 그 물음에 부응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답을 구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들이 현재를 놓지 못한 채 기회를 놓쳐버리는 모습에 대해, 잡을 수 있음에도 잡지 않고 고뇌하는 것에 대해 어리석다 할 수는 없다.


쥐고 있는 현실과 다가온 기회 사이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재 붙잡은 나뭇가지를 놓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기회를 붙잡는 것이다. 또는 양쪽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필요한 것만 각각 취하는 것이 보다 절충적인 방법일 것이다. 물론, 이는 어떻게 보면 어른이 아이에게 A나 B 장난감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을 때, 둘 다를 고르려는 아이와 같다는 점에서, 과한 욕심이라 볼 수도 있겠다.


나는 바로 그런 아이처럼, 두 선택지를 모두 취하려는 관점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욕심 많은 인간처럼 어느 것도 놓지 못한 채 머물러 있고, 결국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절벽에 매달린 자가 기회를 앞에 두고도 망설이는 이유를, 나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인간의 수명 또한 유한하기에, 인생의 기로에 있어 모든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을 하고 난 뒤, 자신이 택하지 않은 길을 돌아보게 된다.


나의 형 또한 그런 선택을 해왔고, 그 선택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형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이 되었다. 그것이 형이 가진 현실과 다가온 기회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생각을 가지고 비교하여, 자신이 최선이라 생각한 것을 선택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이 확신을 주지는 않기에 형은 한편으로, 선택하지 않은 길을 되돌아보고, 동경한다. 그곳이 더 나은 선택지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착실한 삶을 걸어온 형에게 주어진 거대한 기업의 울타리는, 안정이라는 이름의 그늘이었다. 하지만 그 안정은 결코 영원하지 않았고, 그 너머엔 막막한 허공만이 펼쳐져 있음을 형은 점차 깨닫게 되었다.


거대한 울타리는 형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가두는 상자가 되었다. 그 상자가 주는 안정감은 익숙함을 넘어 삶의 무력감과 따분함으로 변했고, 잘 짜인 체계는 역설적으로 그에게서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주체적 감각을 점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그 상자가 사라졌을 때,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울타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확실성은 형에게 깊은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명예보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중시하는 실리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형에게, 나에게 들어온 제안은 지금 자신의 삶과는 정반대의 세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곳엔 울타리도, 잘 짜인 체계도 없어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바로 그 무방비 상태 속에서 일찍이 자신의 힘으로 삶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엿보였기에, 형에게는 매력적인 기회로도 보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형에게 있어, 무언가를 명확히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 놓여 있고, 그 안에서 불안해하면서도 기회를 붙잡지 않는 나의 모습은, 명실상부 형이 이야기한 일화 속의 인간이었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하고, 파국이 가까워졌음에도 기회를 붙잡지 못하는 자의 모습은 분명 어리석다. 그러나 그런 어리석음도 인간이 지닌 여러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어리석음을 품은 무수한 인간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형은 내가 이런 방식으로 사고의 흐름을 전개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나’라는 문제를 다룰 때조차 나는 자꾸만 나를 대상화하여 제삼자처럼 바라보고, 그것을 인간 일반의 문제로 확장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형은 이러한 태도를, 내가 나 자신과 직접 마주하지 못하고 타인들 속에 몸을 숨기려는 방식이라고 본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 분석이 아마도 틀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작은 상자를 박차고 나와 스스로 만든 자화상이 깨지는 과정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것이 성숙해지기 위한 초석이라면, 나는 지금 그 과정을 주저하고 있는 셈이고, 그렇다면 나는 스스로를 마주할 용기를 아직 갖지 못한 정신적 미숙아일지도 모르겠다.


이 정신적 미숙아를 담고 있는 육신은, 사회적으로는 이미 성인의 껍질을 두르고 살아가며, 그 나이에 걸맞은 삶의 결을 기대받는다. 그러나 그 속은 여전히 미완의 결을 지닌 채 요동친다.


이 미숙함이 불러오는 내적 불균형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고, 결국엔 더 이상 단순한 미숙함이 아닌 ‘기괴함’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평균적인 적정함의 선, 그것에서 벗어나더라도 이해 가능한 선을 넘어서게 되면, ‘기괴’라는 영역에 이르게 된다. 이 영역에 이르면, 스스로에 의해서든 타인에 의해서든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지점에 이르렀기에, 외려 누구도 기대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얻게 되는 자유가 있다.


마치 한스 카스토로프가 학교에서 성적이 좋지 않아 낙제생으로 확정되었을 때 느낀 자유로움처럼 말이다.


나는 결국, 절벽에 매달린 채 툴툴대는 인간이다. 기회가 다가와도, 나뭇가지를 놓을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런 어리석음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면, 확신 없는 미래에도 불구하고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발걸음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고민한다. 스스로 만든 껍질을 깨지 못한 채. 사회는 어리석음을 일정 기간은 용인하지만, 그 유예의 시간도 끝나가고 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머지않아 ‘낙제생’이라는 낙인이 나에게 붙게 될지도 모른다.


그 낙인은, 기대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자에게 붙는 것일 테지만, 바로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제공한다. 모두가 가고 대부분이 겪는 길에서 이탈한 자에게, 아무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다.


그 자유는, 낙오가 준 선물이자 파멸의 전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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