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

by 몽당연필


시간은 너의 걸음을 멈춰 세웠지만, 내 걸음은 계속 내버려 두었다. 삶에 충실하게 살아온 너와 달리 허술하게 살아온 내가 걸어가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한가로운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굼벵이와 같이 살아가면서도 나는 작은 행복들을 느낀다. 나는 어제의 나와 달리 혼자의 힘으로 나가 일을 하고 그 대가를 얻었다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어제의 나보다 악기 연주 실력이 나아졌음이 행복하다. 나는 그제의 후덥지근하고 푹푹 찌던 더위와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들에게서 벗어나, 이제는 서늘해진 공기와 바싹 마른 잎사귀들이 흩날리며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리는 인적 없는 거리 속을 걷는 것이 행복하다. 이런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다가, 일기를 펼쳐볼 때 즈음에 덜컥 너의 부재를 깨닫는다.


만약 우리의 입장이 바뀌었으면 너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충실하고 행동이 빠른 너는 슬픔과 아쉬움을 훌훌 털어내고 자신의 삶을 보란 듯이 멋지게 살아나갈 것이다. 친구의 부재는 너의 발걸음을 잠깐 주춤하게 할지언정 멈추지 못할 것이다. 너는 다시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더위는,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지고, 목을 움츠러들게 하는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한 채 네 발로 기어 다니며 우는 것밖에 못했던 조카들은 두 발로 일어서서 뛰어다니며 제법 말을 한다. 생각해 보니 너의 조카도 이제 세상 밖으로 나와 처음 마주하는 세계에 적응하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젊음과 추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들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이라고 막연히 믿는다. 그러나 조카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며, 부모님의 머리가 희끗해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것이 착각임을, 순서가 넘어갔음을 비로소 체감한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그랬듯, 이제 우리는 그들을 위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다가 조용히 고개를 숙일 차례가 온 것이다.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언제든 마침표가 찍힐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침표는 영영 등장하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그러다가 마침표가 덜컥 찍히고 나서야, 그것이 늘 곁에 존재하고 있던 엄연한 사실임을 뒤늦게 체감하게 된다.


삶은 무언가를 거머쥐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쥔 것을 놓쳐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여정의 끝은 바꿀 수 없는 하나의 결과로 정해져 있는 것이고, 정해진 결과를 향해 너는 그저 나보다 한 발짝 앞서 나아갔을 뿐이다.


그러니 너의 여정의 끝은 나에게 있어 특별한 것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놀라울 것은 없는, 저마다 끝을 알리는 무수히 펼쳐져 있는 별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는 굳이 쓰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당연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말을 구호처럼 반복하는 건, 정작 그 당연함을 가장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생각과 달리, 실제의 행동과 마음속에는 여전히 감정의 괴리가 존재한다. 나는 너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나누었던 대화들을 곱씹어보다 작아졌던 네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순간, 여전히 곤혹스러워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메신저 속에 버젓이 남아 있는 너의 계정이 침묵을 유지하는 것을 바라보며, 문득 네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너는 나를 보고 변했다고, 그래서 대화가 예전과 같지 않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타인과 연결되어 있고 무엇이든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 너와, 고립되어 있고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과 서로 다른 상황을 마주하며 지나간 세월은, 서로 다른 무늬를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나도 변했듯이 너 또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분명,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학창 시절, 놀이터 지붕과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지칠 줄 모르고 떠들던 때와 같을 수 없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른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우린 비슷했다. 너와 나는 서로 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우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철없던 시절의 웃음기와 솔직하고 가벼운 표정은 여전히 서로에게 남아 있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섞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로서 많은 것을 허심탄회하게 말하며, 많은 것이 달라졌더라도, 다시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 아이처럼 마음껏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상상의 나래는 망상이 되어 가루로 잘게 부서져 사라진다. 때로는 거슬릴 정도로 울리던 전화도, 답하기 귀찮았던 문자도 이제는 조용하다. 익숙하지만 앞으로는 진정으로 떨어질 수 없는 단짝이 되어 항상 곁에 존재할 침묵 속에서 조악한 글을 끼적거리는 나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연결을 원하던 너와 그런 연결을 번거로워했던 내가, 막상 그런 연결이 사라지자 적적함을 느낀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살아나가고자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곡차곡 쌓이는 새로운 기억들은 기존의 생생했던 기억들을 점차 퇴색시켜 갈 것이다. 너에 대한 추억과 솟아오르던 감정도 어느새 저 한편으로 밀려나갈 것이다.


해안가에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공들여 쌓은 모래성이 차츰 쓸려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그렇게 너에 대한 기념비는 점점 갉아먹힐 것이다. 아마 나는 그 기념비가 깎여 나가는 것에 대해 스스로 책망하면서도, 끝내 그 파도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 걸음은 너의 자리로부터 차츰 멀어져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끝내 진중해지지는 못한 이토록 무심한 듯 가벼운 내 걸음에, 부디 상처받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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