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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목 Jun 16. 2022

나는 죽은 자만 존경할 것이다

insight

나는 신화 속 죽은 자만 존경할 것이다.  

산자는 낡아가는 순간의  존재이기에 내가 그의 붕괴를 받아들이며 견딜 자신이 없 때문이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인간은 육체의 노예다.

그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런 그의  삶을 이해하고 추앙하여 그의 권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자발적으로 그의 종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누굴 좋아하고 사랑하기를 즐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끝자락에는 존경이라는 문턱이 있다. 가능하다면 그걸 넘어서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말없이 나를 잡아끈다. 영원한 진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순간의 인간 권위에 몸과 마음을 생의 안락을 위해 기대고픈 현실의 갈림길에서 나는 늘 시달린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숙명으로 사라질 순간의 존재다. 그의 몸과 권위는 언젠가는 병들고  지저분해질 것이 확실하다. 한때의 강건하고 멋진 클라이맥스 순간의 존경심도 시간에 따라 점차 시들해질 것이고, 그를 존경하는 나도 지속적으로 존경심 이어가지 못하는 자책감과 의리에 괴로워할 내 마음의 미래 고뇌를 잘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기리는 제사 또한 허망한 이벤트이다. 그것은 죽어서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허상에 대한 허망한 존경이며. 주변의 눈총에 대한 위로와 위선이며, 미래 죽은 나를 대할 자녀들에 대한 일종의 데몬스트레이션(demonstration)이다. 혹여나 하는 나에 대한 자녀들의 작은 존경과 허명에 대한 확신 없는 기대 행위다.  


나는 4대 증손자다. 태생적으로 조상숭배 의무가 주어진 사람이다.

그러나, 문들어진 뼈나 잘 빻아진 한 줌 유골에 상 그득 차려 제사 잘 지내고, 공손하게 절하는 것보다 평소 한 번이라도 더 찾고 따뜻한 음식 나누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살아생전 데면데면하다 주검 앞에 울고불고하다가, 보이지 않는 님을 향해 상다리 부러지도록 차리면 무엇하나, 제사상 앞에서 존경 가득 담아 절한다고 가신 님이 알아볼까? 그동안의 불효를 용서해주실까?   

그런다고 지금 현실의 삶이 죽은 자에 의해 풍요로워지기나 할까?

그런 기복(祈福)의 기대는 한물간 일종의 환상이고 장사치들의 마술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미래보다 보이는 현실을 택하고 싶다.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 가사도 있잖은가.

그래서 나는 매주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뵈러 간다. 돌아가시면 화장하고  산에 뿌려드리고 잊어버릴 거다.

납골당에도 모시지 않을 것이다. 이기적 자기 위로나 타인의 시선에 대한 부질없는 위선거부한다.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리하고 싶다. 사자가 생자의 걸림돌이 되는 게 싫다.

죽음은 현실과  다른 세계다. 사후는 살아있는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상의 세계다. 그것은 냇가의 물고기를 뜰채로 건져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도 모르는 힘에 의해 사라지는 물고기가 어찌 냇가 바깥세상과 뜰채를 든 사람의 존재를 알 수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하고 상상해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죽음은 명확한 하나의 존재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인간  아무도 뭐라고 규명하지  못하는 불확실한 영역이다. 이렇게 확실히 보이지 만, 뭔지 모르는 ‘상상의 불확실’한 세계를 현실에서 아무리 고민하고 해석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설령 죽음의 세계를 소상하게 잘 파악한다 해도 현실에서 무슨 뾰족한 대책 같은 걸 세울 수도 없다. 어차피 가게 될 테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고, 대책도 세울 수 없는 판도라 상자를 껴안고 고민하는 것은 더 이상 시간 낭비다.


그러니 답은 하나

"네 주어진 지금의 삶에 충실하라 “

나 스스로의 호흡에 충실하면서 하루하루를 영원처럼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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